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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수)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삶] 교도소에서 초등학생 딸의 머리 한올한올 땋아주는 엄마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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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친화적 가족 접견실 전국 교도소에 설치돼…재소자 교정에 도움"

"수용자 자녀도 피해자…경제·정서적 고통 많아"…이경림 세움 대표

[※ 편집자 주= 수용자 자녀를 돕는 세움의 이경림 대표 인터뷰는 분량이 많아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오늘(24일) 나가는 이 기사는 첫 번째입니다. 세 번째 인터뷰 기사는 조만간 송고할 예정입니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 "5살 먹은 아이는 엄마와 함께 교도소에 왔다. 아빠를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저쪽에서 아빠가 걸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아빠여서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아빠를 만질 수도 없고, 안길 수도 없었다. 더욱이 아빠는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는 열어주지 않았다. 아이는 그곳이 교도소인 줄 모르기에 아빠로부터 거부당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는 이 장면을 보고 펑펑 울었다."

위 이야기는 아동 친화적 가족 접견실이 도입되기 전에 교도소 면회실에 있었던 일이다. 반면에 다음은 2017년부터 전국 교도소에 설치된 아동 친화적 가족 접견실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모습이다.

"교도소에 할아버지와 초등학생 손녀딸이 면회를 왔다. 할아버지의 딸 미숙(가명) 씨가 수용자였다. 접견 장소는 가정집 거실 같았다. 할아버지는 음식을 만들 줄 몰랐기에 달걀부침 10개를 만들어 와서 내놨다. 미숙 씨는 딸이지만 엄마이기도 했다. 7년 만에 딸을 봤지만, 해줄 게 없었다. 그녀는 어린 딸의 머리를 빗겨주고, 한올 한올 땋아주기 시작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경림 세움 대표
[촬영 김수지]


이경림(59)은 교도소 수용자 자녀들을 지원하는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의 대표다. 세움은 아동 친화적인 가족 접견실을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단체다.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30여년간 어려움에 빠진 아이들을 돕는 일을 했다.

지난 18일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가해자인 교도소 수용자의 자녀들도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부모의 범죄에 대해 공모한 것도 아닌데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그는 "범죄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친구들이 떠나고, 학부모들의 시위로 전학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면서 "일부 아이는 보육원에 들어가기도 하고, 보호자 없이 아이들끼리만 생활하기도 한다"고 했다.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대표는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일본어교육학과를 졸업했고 강남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교 졸업 후에 서울 금천구 시흥2동에서 6년간 달동네 아이들을 도왔다. 이어 빈민 가정을 지원하는 부스러기사랑나눔회에서 23년간 일하면서 사무총장, 상임이사 등을 지냈다. 2015년에는 세움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교도소 수용자 자녀들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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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함께한 이경림 대표(오른쪽 아이, 왼쪽 아이는 언니)
[본인 제공]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

▲ 아버지는 평안남도 중화군 간동면 출신이다. 6·25전쟁 때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뒤 식당을 운영하셨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갈비도 파는 평양 냉면집을 열었는데, 하루는 백낙준 당시 연세대 총장이 아빠 식당에 오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백 총장은 "맛이 너무 좋다. 이게 정말 평양냉면"이라고 하면서 연세대에 들어와서 식당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백 총장은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는 연세대 구내식당과 교수 식당, 세브란스병원 구내식당을 운영했고 숙명여대, 성균관대 구내식당도 맡으셨다.

-- 아버지가 이북에서도 부자였나.

▲ 북한에서 아버지는 지주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그 바람에 김일성에 의해 쫓겨나 해주로 갔다가 월남하셨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이미 결혼했고 6남매를 둔 상태였다. 아버지는 당시 장남한테 며칠만 피해 있다가 금방 돌아올 테니 엄마와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고 당부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는 고향에 가지 못했고, 북한의 가족들도 만나지 못했다. 북한에 있는 자식들을 내내 그리워하다 돌아가셨다.

-- 아버지에 대해 기억에 남는 것은

▲ 아버지는 매우 성실한 분이었다. 약속 장소에 1시간 일찍 나가실 정도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절대로 1등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꼴찌도 하지 말고 중간만 하라고 하셨다. 1등을 하면 그걸 지키느라 너무 힘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나.

▲ 황해도 사리원 출신인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신앙심이 강하셨다. 어머니는 평소에 세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건 "기도하라, 먹어라, 잠자라"였다. 공부하라는 말씀은 없었다. 어머니는 93세에 돌아가시면서 나한테 남기신 마지막 말이 있다. 그건 "너는 사회복지 일을 하면서 후원금을 받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데, 아이들이 고맙다고 할 것이다. 그건 너한테 고맙다는 게 아니고 후원자들한테 고맙다는 뜻이다. 그러니 교만하지 말고, 온유해야 한다"였다. 이 말씀을 하신 지 3주 후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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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림 대표의 초등학교 우정회 회원증
[본인 제공]


-- 초중고 시절은 어떻게 지냈나.

▲ 맑고, 밝고, 환하게 지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른들이 나에게 꿈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사회사업가가 되겠다고 했다. 이 말에 놀란 어른들은 사회사업가가 뭔지는 아느냐고 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보육원 같은 곳의 아이들을 돕는 것이라고 나는 답변했다. 지금의 나는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 어린 시절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 교회를 다니면서 보육원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 영향을 받은 듯하다. 평소에 어머니와 아버지도 남을 도와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친구와 둘이 우정회를 만들었다. 힘들게 사는 친구를 한 달에 한 사람씩 선정해서 연필이나 노트를 남몰래 주는 모임이었다. 우리는 용돈을 모아 선물을 산 뒤 예쁘게 포장해서 아침 일찍 그 친구의 서랍에 넣었다. 우정회 회원증도 있었는데, 그 친구의 언니가 써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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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림 대표가 결혼 직후에 거주했던 시흥2동 달동네 집
[본인 제공]


-- 빈곤층 지원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 1990년대 초반에 결혼하고는 서울 금천구 시흥2동 달동네로 올라갔다. 당시 남편이 감리 신학대 학생회장을 지내고 시흥2동에서 빈민 민중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한다고 하기에 같이 갔다. 나는 태어나서 그런 곳은 처음 봤다. 그 지역 사람들은 단칸방에서 가족 5∼6명이 살고 있었다. 집에 화장실이 없어 공중변소를 사용해야 했고, 수도가 없어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 남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나.

▲ 부유한 가정에 살던 나의 인생에서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운동권 남편을 만나면서 변증법 같은 서적도 읽었고, 사회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우리가 신혼여행을 간 곳도 광주 5.18 묘역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지면서 남편에게 멘붕이 왔다. 당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주체사상에 환상을 가졌던 많은 운동권 사람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지향하는 사회 모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시련이 왔다. 자궁이 안 좋은 탓인지 5차례나 유산했고, 한 아이는 인큐베이터에서 1주일 정도 살다 하늘나라로 갔다. 그때 나는 임신한 사람과 아기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런 상태에서 남편은 농사를 짓는다면서 지방으로 내려갔고, 나는 서울에서 활동했기에 공유하는 것이 없어졌다. 결국은 이혼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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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림 대표가 일했던 시흥동 달동네 모습
[본인 제공]


-- 시흥동 달동네에서 어떤 일을 했나.

▲ 낮에는 부모들이 일하러 나가기 때문에 아이들이 방치됐다. 나는 공부방을 열어 그 아이들을 돌봤다. 간식도 먹이고, 밥도 줬다. 밤에는 어머니 학교를 열어 한글을 가르쳤다. 한 어머니는 군대에 간 아들에게 처음으로 삐뚤삐뚤한 글씨의 편지를 써서 나에게 읽어주고는 펑펑 우셨다. 기본적인 알파벳도 가르쳤다. 어머니들이 인근 구로공단에서 라벨을 붙이는 일을 하는데 L(Large), S(Small)를 몰랐기에 이런 교육이 필요했다. 어머니들과 화투도 하고, 짜장면도 먹으면서 철거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 한번은 10∼15명의 공부방 아이와 뒷산으로 소풍을 가기 위해 김밥을 만들었다. 몸집이 작은 한 아이가 썰지도 않은 김밥을 통째로 집어 들고는 한 자리에서 2∼3개를 먹어 치웠다. 나는 체할까 봐 걱정했는데, 그 아이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고 했다. 평소에 많이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는 간식으로 요구르트를 줘도 먹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집에 있는 2살짜리 동생에게 가져다주려 한다고 했다.

-- 그 지역은 철거됐나.

▲ 나는 그곳에서 6년 정도 활동했다. 개발 명목으로 철거되면서 그 지역 주민들은 수도권 변두리로 쫓겨났다. 주민들이 하나둘 이사하고, 빈집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은 정서적 타격도 입었다. 삶의 터전이 바뀌고, 친한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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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철거되는 달동네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부스러기 사랑나눔회는 어떤 일을 했나.

▲ 도시와 농촌의 빈곤 지역 아동을 돕는 일을 했다. 가정폭력을 피해 온 아이들을 지원하는 일도 했다. 아이들의 피신처인 그 쉼터가 바로 '민들레 집'이었다. 하루는 민들레 집에 피신 온 초등학교 1∼2학년 아이들이 성(性) 놀이를 하는 것을 봤다. 집에서 폭력뿐 아니라 성 학대도 당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를 계기로 13세 미만의 성 학대 피해자를 위한 쉼터 '로뎀나무 집'을 시범적으로 운영했다. 시흥동 아래쪽에는 밥을 제공하는 교회가 있었는데, 1주일에 한 번씩 그 교회에 가서 식사를 만들어 어른들에게 대접하는 일도 했다. 내 친구가 반찬을 만들어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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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무현 정부 인수위 직원들
[연합뉴스 자료사진]


-- 공부방은 지역아동센터로 법제화됐나.

▲ 2003년 노무현 정부의 인수위원회에 팩스를 보냈다. 공부방을 지역아동센터로 만들어 아동복지법 안으로 법제화해달라는 제안서였다. 이것이 참여정부 국민제안 1호로 접수됐다. 우리는 전국에 있는 공부방 아이들한테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해서 책자로 만들어 제출했다. 300명의 아이가 "햄버거집을 만들어 주세요", "우리 동네에 가로등을 만들어주세요" 등 순진무구하고도 다양한 제안을 했다. 아이들이 이 책자를 노무현 대통령한테 전달하는 행사도 있었는데, 이 장면이 방송사 뉴스로 나오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공부방은 지역아동센터로 법제화가 됐다.

-- 23년간이나 부스러기사랑나눔회에서 일한 이유는.

▲ 나는 이 단체가 생긴 지 2년 정도 지난 무렵에 참여했다. 그때는 설립자인 강명순 목사와 나를 포함한 2명의 간사만이 있었다. 그러니 나는 거의 창립 멤버였다. 우리는 아동을 돕는 일을 하나하나 법제화하면서 뿌듯함을 느꼈다. 민들레 집은 그룹홈, 로뎀나무 집은 해바라기센터로 법제화됐다. '신나는 조합'을 만들어 빈곤층에게 소액의 창업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무담보 소액 대출사업으로 법제화됐다. '신나는 조합'에서 대출해주는 100만원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풀빵 장수도 찾아가 보고, 알코올 중독자를 쫓아다니기도 했던 일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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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경림 대표
[촬영 김수지]


-- '세움'은 어떻게 시작됐나.

▲ 초등학교 5학년생 여자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으나 성실한 사람이었다. 트럭에 채소를 싣고 다니면서 장사를 했는데, 무면허 사고로 수감됐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부인과 이혼한 상태였기에 딸을 동네의 지인한테 맡겼다. 얼마 후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다. 이 사람이 아이를 성적으로 학대한 것이다. 이 아이가 로뎀나무 집에 오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 나는 수용자 자녀에 대한 체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 세움은 주로 어떤 일을 하나.

▲ 부모 중 한명 또는 부모 모두가 수감되면 그 자녀들은 위기에 빠진다. 당장 생계가 어려워지고, 정서적으로 흔들린다. 돈이 없어서 면회도 가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한다.

-- 수용자 자녀는 어느 정도 있나.

▲ 전국에 5만4천명 정도 있다. 수용자 자녀의 40%는 부모의 수감 사실을 알지만 60%는 모른다. 보호자가 아이들한테 알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 아버지가 수감되면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아이에게 뭐라고 설명하나.

▲ 외국이나 지방에 일하러 갔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면 교도소에서 근무한다고 둘러댄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게 된다. 일하러 멀리 간 것이라면 전화라도 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 수용자 자녀가 부모의 수감 사실을 알게 되는 경로는.

▲ 친척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수용자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아이가 우연히 듣고는 부모가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재판 일정이 들어있는 우편물을 보게 되는 경우, 할머니의 휴대전화 메시지를 접하게 되는 경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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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광주교도소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아이한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나은가.

▲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권한다. 아이는 혹시 부모한테 버려진 것이 아닌지, 부모가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부모가 감옥에 있다고 이야기하면 차라리 안도한다. 자기를 버렸거나 사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아이가 부모의 행방을 알고자 할 때, 알려줬을 경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될 때 이야기하라고 한다. 부모의 구체적 범죄 내용을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 아버지가 잘못한 일이 있고, 벌을 받기 위해 교도소에 있으며, 원하면 면회를 할 수 있다는 정도로 말해주면 된다.

--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나.

▲ 작년에 서울 강남 지역에 물난리가 났을 때 한 아이의 아빠가 수감됐다. 몇개월 후 겨울에 어머니는 고민 끝에 아이에게 아빠의 수감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아빠가 물난리로 죽은 줄 알았다는 것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수감 사실보다는 자신을 버렸는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죽었는지 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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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교도소 일반 면회실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아동 친화적 가족 접견이란 무엇인가.

▲ 아이들이 면회하는 시간을 기존의 15분에서 1시간 이상으로 늘리고, 면회 장소도 가정집 거실처럼 꾸미는 것이다. 그곳에서 책도 보고, 껴안을 수 있고, 밥도 먹는다. 재소자는 죄수복이 아닌 일반 옷을 입는다. 우리가 시범적으로 시행하자고 제안했고, 처음으로 2017년 여주교도소에 이 접견실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전국에 있는 거의 모든 교도소가 이런 접견실을 갖고 있다. 이런 식의 면회는 재소자의 교정에도 도움을 준다.

-- 아 접견실 설치는 수월했나.

▲ 당시 여주교도소 계장님한테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때 교도관들의 상당수가 업무가 힘들어진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그 계장님은 본인이 청소를 비롯한 추가 업무를 감당하겠다고 하면서 밀어붙였다. 당시 적극적으로 나서준 법무부 담당과의 과장님, 사무관님, 주무관님에게도 고맙다.

-- 아동 친화적 접견을 제안하게 된 계기는.

▲ 5살 먹은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아빠와의 관계가 좋았다. 어느 날 아빠는 교도소에 가게 됐다. 아이는 갑자기 사라진 아빠를 밤마다 찾았다. 엄마는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웠기에 어떻게 하면 좋은지 우리한테 문의했다. 우리 단체 담당부장은 아이를 데리고 면회를 가보라고 권했다. 엄마는 용기를 내서 아이와 함께 교도소에 가서 접견했는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아이는 저쪽에서 걸어오는 아빠를 봤는데 만질 수 없고, 안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이는 아빠가 문을 걸어 잠그고 열어주지 않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곳이 교도소인 줄 모르는 아이는 아버지가 자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장면을 본 엄마는 펑펑 울면서 다시는 아이와 함께 면회하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이 경험을 계기로 아동 친화적 접견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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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아동 친화적인 가족 접견실
[본인 제공]


-- 아동 친화적 가족 접견실에서 노래도 부를 수 있나.

▲ 여주에 있던 한 교도관은 27년 만에 처음으로 교도소 내에서 어린아이의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아이가 재소자인 아빠 앞에 나와서는 어린이집에서 배운 대로 율동하고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아동 친화적 접견은 이렇게 가정집에 있는 것처럼 진행된다.

-- 아동 친화적 접견을 직접 봤나.

▲ 우리 단체의 부장님이 동행 면회를 한 일이 있다. 할아버지가 딸을 교도소에 보내놓고 손녀딸을 키우고 있었다. 나이 80세가 넘은 할아버지는 음식을 만들 줄 모르니 달걀부침 10개를 만들어 가져갔다. 아이의 엄마는 7년 만에 자식을 만났지만, 초등학교 6학년생인 딸한테 해줄 게 없었다. 아이가 접견실을 나왔는데, 변한 게 있었다. 머리가 곱게 땋아져 있었다. 엄마가 머리를 빗겨주고 머리를 한올 한올 따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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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움 이경림 대표 인터뷰 사진
[촬영 김수지]


-- 수용자 자녀들은 생활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나.

▲ 친구의 부모는 범죄자의 자녀와 놀지 말라고 한다. 어떤 학부모들은 수용자 자녀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키라고 시위까지 했다. 부모 모두 감옥에 가고, 돌봐줄 친척도 없어서 보육원에 들어가는 아이도 있다. 미성년 아이들끼리만 사는 경우도 있다.

-- 가해자 가족보다는 피해자 가족을 도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는 뭐라고 하나.

▲ 우리가 피해자 가족을 돕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동을 돕는 단체이기 때문에 아동을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의 아동이라면 누구라도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 피해자와 그 가족을 지원하는 시스템은 있나.

▲ 피해자 지원에 관한 법률은 2008년에 만들어졌다. 이를 근거로 조성된 범죄 피해자기금을 통해 피해자를 지원하는 제도가 있다. 피해자 가족 지원 협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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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부산지검-세움 수용자 자녀 경제적·정서적 지원 업무협약
왼쪽부터 당시 권순범 부산지검 검사장, 이경림 세움 대표, 김영식 부산구치소 소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 부모가 중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그 자녀들이 부모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텐데, 뭐라고 조언하나.

▲ 부모와 상관없이 너의 인생을 살라고 권한다. 너의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성장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어떤 환경이나 누구의 자식이라는 꼬리표에 얽매이지 않고 당당하게 일어서고 넘어서라고 말한다. 그게 우리 단체의 사명이다.

--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 수용자 자녀도 보통의 자녀들과 같다. 다르게 보지 않았으면 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줬으면 한다.

(취재지원 김수지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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