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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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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읽다]회색고래의 죽음과 가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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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미지출처=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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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고래(Grey Whale)는 우리나라에서는 ‘귀신고래’라고 불린다. 몸길이 15m, 몸무게 36t까지 자라는 귀신고래는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가 포상금까지 내걸면서 귀신고래 찾기에 나섰지만, 귀신고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게 된 귀신고래지만 미국에서는 개체 수가 늘어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2019년부터 회색 고래가 죽은 채 파도에 미국 해안으로 밀려오는 모습이 연이어 포착됐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매년 수백 마리가 죽은 채 해안에 좌초한 모습은 환경파괴의 무서움을 경고하는 듯했다. 미국 태평양 해안에서 관측된 회색 고래 사체는 680마리에 달했다. 미국해양대기청(NOAA)은 비정상적인 폐사 사건에 대한 집중 조사를 뜻하는 ‘UME(Unusual Mortality Event)’ 조치까지 발동했다. 20세기 초 포경산업 확대로 회색 고래가 멸종 위기에 몰렸던 과거까지 소환되며 공포를 자극했다.

과학계는 회색 고래 ‘의문사’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수년간 매달렸다. 기후 변화에 따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라는 대략적인 추측은 있었지만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고래가 배와 충돌한 것이다’ ‘어구에 얽혔다’ ‘희귀 질병에 걸렸다’ 등 다양한 추측들만 난무했다. 잠수함의 수중음파탐지기인 ‘소나’의 소음이 야기한 스트레스로 인한 사망 가능성마저 제기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까지 이 문제에 끼어들었다. 트럼프는 해상 풍력터빈이 고래 사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화석 에너지를 선호하는 트럼프는 풍력발전으로 대변되는 재생에너지 산업을 헐뜯기 위해 이런 주장을 했을 것으로 풀이된다. 과학자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지만, 트럼프의 발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짜 뉴스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지만, 선동은 과학보다 가깝기 마련이다.

최근에서야 고래들의 폐사 이유가 드러났다. 결론은 트럼프의 발언이 가짜 뉴스였음을 증명했다. 고래들은 배가 고파 굶어 죽은 것이었다. 사이언스(Science) 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회색 고래의 주된 먹잇감인 새우 등 갑각류 부족이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는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리면서 벌어진 비극이다. 북극 빙하 해빙으로 고래들이 새우를 쉽게 먹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지만, 새우 서식 환경 변화가 새우 개체 수 감소로 이어지면서 고래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회색 고래는 결국 사람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가짜 뉴스 때문에 엉뚱하게도 재생 에너지 산업이 피해를 볼 뻔했다.

회색 고래 개체 수가 약 2만5000마리까지 늘어난 만큼 당장 멸종 위험은 적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앞으로도 많은 수의 고래가 굶어 죽어 해변으로 떠내려오는 현상은 쉽게 해소하기 어렵다. 인간은 고래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기후 변화로 포항 앞바다에서 귀신고래를 보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이제 귀신고래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전설이 돼 버렸다. 대신 동해 바다에는 참치 사체가 떠내려온다. 후손들은 귀신고래가 사라진 우리 바다에서 참치를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백종민 기자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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