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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이슈 동학개미들의 주식 열풍

파랗게 질린 동학개미, 美로 ‘주식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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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장의 D브리핑]

개인-기관 올들어 韓서 2조원 매도… 美 증시선 8000억원어치 사들여

공매도 금지 등 잇단 조치에도 부진

美日증시 호황중 코스닥 800 붕괴

동아일보

31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한 직원이 얼굴을 감싸쥐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전날보다 0.07% 내린 2,497.09로 거래를 마쳤다. 코스닥지수는 2.40% 급락한 799.24로 마감해 지난해 11월 17일(799.06) 이후 다시 800 선이 붕괴됐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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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식 창을 보세요. 미국은 정확히 빨간색, 한국은 파란색이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누가 미쳤다고 한국 주식을 사겠습니까.” 30대 여성 직장인 최모 씨는 자신이 투자했던 국내 주식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2, 3년 전 매입한 네이버와 삼성전자 같은 국내 대표주의 주가가 이후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깊은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최 씨는 “한국 주식은 너무 빠져서 이젠 팔지도 못할 지경”이라며 “앞으로 여윳돈이 생기면 무조건 미국 주식 위주로 투자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 주식 저평가) 현상이 장기화되고 새해 들어 국내 증시도 깊은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 한국 증시를 등지고 미국 등 해외로 방향을 돌리는 투자자들이 늘고 있다. 이 같은 투자자들의 증시 이탈 현상은 한국 경제와 국내 기업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약해진 결과로 풀이된다. 투자자들이 한국을 떠나게 되면 기업들의 자금 조달 비용이 올라가고 금융 시장 불안이 확산되는 등 경제 전반에 부작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

31일 한국거래소 등에 따르면 올해 첫 달인 1월 2∼30일 국내 개인·기관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서 2조4171억 원가량을 순매도했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 증시에서는 8215억 원에 이르는 주식을 사들였다.

국내 투자자들의 이런 투자 양상은 새해 국내 주가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 기간 삼성전자(―5.4%)와 SK하이닉스(―3.3%) LG에너지솔루션(―12.3%) 네이버(―6.5%) 에코프로(―20.9%) 포스코퓨처엠(―29.2%) 카카오(0%) 등 국내 반도체와 이차전지 대형 기술주 7개는 평균 ―11.1%의 수익률을 보였다. 반면 미국 증시에서 일명 ‘매그니피센트(Magnificent) 7’이라고 불리는 대형 기술주 7인방(애플·알파벳·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엔비디아·테슬라)의 한 달 평균 상승률은 5.2%였다. 각 종목에 100만 원씩 총 700만 원을 투자했다면 한국 주식 7개에 투자했을 때보다 미국 주식 7개에 투자했을 때 110만 원 이상의 수익 차이가 난다는 계산이 나온다.

국내 증시는 31일도 코스닥이 2.40% 급락하며 두 달여 만에 800 선 아래로 추락하는 등 약세로 마감했다. 코스피도 1월 한 달간 6% 내리며 주요국 가운데 중국에 이어 최하위의 성적을 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국 증시는 최근 16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수가 거의 정체돼 있을 정도로 수익률이 좋지 않았다”며 “이런 것에 대한 실망이 누적돼 투자자들이 해외에서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년째 혁신기업 없는 韓 ‘고인물’ 증시, 과도한 규제도 발목


[‘주식 이민’ 가는 동학개미]
경제 역동성 저하가 부진 핵심 원인
정부 단기정책에 증시신뢰 하락 우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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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국내 증시의 약세는 최근 들어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코스피는 2021년 6월 말 3,300을 넘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뒤 2년 7개월 만에 25%가 급락하며 길고 긴 약세장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뉴욕 증시의 대표 지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은 같은 기간 15%가 더 오르면서 연일 사상 최고 수준을 경신 중이다.

전문가들은 한국 증시 부진의 이유로 각국의 고금리 장기화와 국내 대표기업들의 실적 부진, 중국 경기 둔화 등을 주로 꼽는다. 또 낮은 주주환원율과 후진적 기업 지배구조 같은 제도적 요인들이 동학개미 등 투자자들로 하여금 국내 증시를 외면하게 만든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신기술 혁신과 산업구조 재편이 더디게 진행되는 등 국내 경제의 역동성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증시 장기 부진의 핵심 이유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례로 현재 코스피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은 모두 5년 전인 2018년 말에도 증시에서 시총 상위에 속해 있던 기업들이다. 10년 전인 2013년 말로 범위를 넓혀 봐도 이 기간 중 새로 증시에 상장해 ‘톱10’으로 부상한 창업 기업은 셀트리온 하나뿐이었다. 미국 등 주요국에서 혁신기업들이 다수 쏟아지며 증시 판도가 숨 가쁘게 뒤바뀌는 동안 한국은 과도한 규제 등으로 인해 새로운 플레이어의 등장이 지체되면서 기존 대기업 위주의 ‘고인 물’이 증시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평가다.

개인 투자자들의 실망감이 갈수록 커지자 정부는 지난 연말부터 갖가지 증시 부양책을 시리즈로 쏟아내면서 표심 달래기에 나서고 있다. 공매도 금지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추진, 주식 양도소득세 완화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 최근 거침없이 증시가 오르고 있는 일본을 벤치마킹해 상장사의 주주 가치를 높이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도 도입하기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올해 증시 개장식에 참석하는 등 새해 들어 두 번이나 한국거래소를 찾으며 증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부가 이처럼 다급하게 총선용 증시 대책을 남발하다가는 시장 원칙이 훼손되고 한국 증시의 신뢰도가 하락할 것이라는 우려 역시 커지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오히려 당국이 스스로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매도 금지가 단기적으로는 주가 부양에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해 외국인 투자자 이탈 등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는 주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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