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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이슈 질병과 위생관리

섭식장애 10명 중 8명은 여성···세상에 나온 ‘그녀들’의 질병서사[삼키지 못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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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2023)의 한 장면. 박채영씨는 엄마 박상옥씨와 함께 주연으로 이 영화에 출연했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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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내 앞에 입 없는 내가 겨우 옅은 숨을 뱉고 있었다.”

지난해 개봉한 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은 15년 동안 섭식장애와 싸워 온 박채영씨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채영씨와 엄마 박상옥씨는 각자, 그리고 함께 병의 역사를 자신들의 언어로 다시 정리한다. 군사독재 이후 경력이 단절된 워킹맘이자 싱글맘이었던 상옥씨의 삶, 그런 엄마로부터 느꼈던 채영씨의 짙은 외로움, 그럼에도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해보고자 노력했던 과정들이 어떻게 채영씨의 ‘몸’에 새겨졌는지를 영화는 담는다.

채영씨는 영화 개봉과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이것도 제 삶입니다>를 출간했다. 책에서 채영씨는 “질병 서사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 그가 살아낸 사회, 그가 통과한 역사를 볼 수 있고 이로써 인간을, 그리고 그가 앓는 질병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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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람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2023) 포스터. 박채영씨는 엄마 박상옥씨와 함께 주연으로 이 영화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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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식장애는 더 이상 일부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식이장애 진료 현황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2018~2022) 폭식증과 거식증 등 식이장애로 진료받은 환자는 총 5만1253명에 달했다. 2018년 8517명이었던 식이장애 환자는 매년 증가해 2022년 1만2714명을 기록했다. 전체 식이장애 환자 10명 중 8명가량은 여성이었다.

특히 10~20대 여성들의 증가폭이 컸다. 2022년 폭식증으로 진료받은 20대 여성은 2018년 1004명보다 6.2배 늘어난 1475명으로 모든 연령대 중 가장 많았다. 거식증의 경우 10대 이하 여성이 2022년 1874명으로 2018년 275명보다 7배 가까이 급증해 가장 증가폭이 컸다. 기타 식사 장애 역시 10대 이하가 2018년(211명)과 비교해 2022년 1367명으로 6.5배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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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이 부담하는 진료비도 늘어나고 있다. 남인순 민주당 의원이 건보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2018년 39억6312만원이었던 식사장애(질병코드 F50) 진료비는 매년 증가해 2022년 62억9440만원에 달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5년간 총진료비는 239억7247만원이다. 이 중 여성 환자의 진료비가 214억5348만원으로 89%를 차지했다. 식사장애 질병코드가 적용되는 진료는 건강보험 급여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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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니씨와 박채영씨가 자신의 섭식장애 경험을 공유한 에세이 책 <삼키는 연습>(박지니)과 <이것도 제 삶입니다>(박채영). 민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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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식장애 당사자들은 최근 활발히 자신들의 ‘질병서사’를 세상에 공유하고 있다. 이들의 존재는 섭식장애가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이란 오랜 인식을 뒤집는다. 최근 6년간 국내에서 출간된 섭식장애 당사자들의 책만 해도 9권에 달한다. <나는 죽는 것보다 살찌는 게 더 무서웠다>(라미, 2019), <살이 찌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김안젤라, 2021)는 이들은 <날것 그대로의 섭식장애>(이유리, 2022)를 말하고 <나의 정의>(지우, 2023)를 찾아 <나는 식이장애 생존자입니다>(사예, 2022), <이것도 제 삶입니다>(박채영, 2023)라고 얘기한다.

<삼키기 연습>의 저자 박지니씨는 지난해부터 국내 최초로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를 열고 있다. 인식주간엔 당사자 세션이 있다. 각자 에세이 등으로 공유했던 질병 서사를 한 공간에 모여 함께 얘기하는 자리다. 이달 28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열리는 ‘제2회 섭식장애 인식주간’의 주제는 ‘인식적 정의(Epistemic Justice)’다. 철학자 미란다 프리커가 이론화한 ‘인식적 부정의’에서 따왔다. 인식적 부정의란 어떤 상황에서 약자의 위치에 놓인 이들의 말이 전혀 신뢰받지 못하거나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음으로써 폭증되는 부당함을 가리킨다. ‘다이어트를 하다 망해버린 못난 사람들’이란 인식적 부정의를 박지니씨는 뒤집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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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섭식장애 인식주간 포스터. 박지니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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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식주간에는 지난해와 달리 ‘가족 세션’도 추가됐다. <두 사람을 위한 식탁>에 출연했던 엄마 상옥씨를 비롯해 3명의 섭식장애 당사자 가족 패널이 참석한다. 디지털 헬스케어와 의료 시스템 등 섭식장애를 둘러싼 토론과 자기이론(auto-theory)에 관한 공부 세션 등 해외 섭식장애 인식주간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시간도 있다. 박지니씨는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는 수준으로 끝나고 싶지 않았고 연구자들이나 정책 만드는 사람들도 고민을 안 하고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우리는 보고 있고 질문을 던진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두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EDAW2024)
*일시: 2월28일(수) 19:00 ~ 3월5일(화) 22:00
*장소: 서울 성동구 왕십리로 115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 3층 브릭스 ROOM4
*신청 기간: 2월16일(금) 9:00 ~ 2월26일(월) 18:00
*신청 링크: https://event-us.kr/edaw/event/78442


민서영 기자 min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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