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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덩어리진 감정…길 잃고 헤매는 곳마다 감동할 수 있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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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박승연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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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에는 미술관 ‘노이에 피나코테크’, 스위스 취리히에는 미술관 ‘쿤스트 할레’가 있습니다. 독일어로 노이에(NEUE)는 새로운, 쿤스트(KUNST)는 예술이라는 뜻인데요. 한겨레가 ‘노이에 쿤스트’를 시작합니다. 노이에 쿤스트는 시각예술을 다루는 미술 전문 영상 콘텐츠입니다.





“인생은 공(空), 파멸(破滅)”



1973년 조각가 권진규(당시 51살)는 제자 김정제에게 인생은 덧없고, 결국 파괴돼 없어진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긴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여동생 권경숙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나의 아이들(작품)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했습니다. 편지 십수통과 돈 30만원. 그가 세상에 두고 간 마지막 흔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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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의 ‘도모’(1951). 박승연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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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규의 ‘여성입상’(1954). 박승연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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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생의 의지가 없던 건 아니었습니다. 1949~1959년 권진규는 일본에서 서양 근대 조각을 공부한 뒤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치겠다는 꿈을 품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현실은 차가웠습니다. 당시 한국 미술계 주류는 색채·질감·선과 같은 추상적 요소로만 작품을 표현하는 ‘추상미술’이었습니다. 현실 세계, 특히 인간 형태의 표현에 주목하는 ‘구상미술’을 추구하던 권진규의 작품은 외면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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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그림 ‘황소’를 모티브로 만든 권진규의 ‘흰소’(1972). 박승연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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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잃은 작품은 오랫동안 안식처를 찾지 못했습니다. 2015년 유족은 ‘권진규미술관’ 건립을 약속한 기업에 작품 700여점을 40억원에 양도했지만,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유족은 치열한 소송전 끝에 작품을 돌려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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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1897∼1910) 시절 벨기에 영사관으로 사용됐던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한 차례 이사했다. 박승연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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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은 영구 상설 전시를 조건으로 서울시에 작품을 기증했습니다. ‘권진규의 영원한 집’은 그렇게 험난한 여정을 거쳐 지난해 6월 서울시 중구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가 떠난 지 50년 만이었습니다.



과거 벨기에 영사관이기도 했던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1층은 현재 권진규 작품의 상설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과 결이 맞는 현대 조각가들 작품은 2층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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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서울시 성북구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촬영한 권진규의 모습. 박승연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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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학계에서는 권진규를 ‘비운의 조각가’로 보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미술계의 차별과 냉대가 그를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을 것이란 추측입니다.



최근에는 그를 영원성을 추구한 조각계 거장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동·서양 미술사를 섭렵한 작가가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초월과 불멸의 이미지를 욕망했을 거라는 해석인데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권진규가 덩어리진 감정을 빚고 다듬으며 말하려고 했던 ‘영원함’이 뭔지 영상을 통해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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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글 황인솔 기자 breezy@hani.co.kr
영상 박승연 피디 ye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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