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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이슈 최저임금 인상과 갈등

최저임금 수준 버는 장인 5만명… 이들 손기술이 빛 볼 수 있게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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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 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3] 기초 산업 노동자들의 소외

조선일보

지난달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창신동 한 공방에서 김선숙(56)씨가 미싱으로 강아지 옷을 만들고 있다. 김씨는 “봉제 산업에 젊은 사람들이 오질 않아 기술이 사라질까 걱정”이라고 했다. /장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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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사 김선숙(56)씨는 열아홉 살이던 1987년 고향인 전남 곡성을 떠나 봉제 공장이 밀집한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인근에 처음 발을 들였다. 2남 3녀의 막내였던 자신이 봉제 일을 하겠다고 하자 부모·형제들이 “고운 손 닳는다”며 말렸던 게 엊그제 같다.

미싱 앞에서 다림질하던 ‘시다(견습공)’ 김씨는 어느덧 약 40년 경력의 봉제 기술자가 됐다. 요즘 하루 8~9시간 동대문 패션 상가 등에서 주문한 옷을 만들며 생계를 꾸린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동네 문화센터에서 한복이나 반려동물 옷 등을 직접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도 활동한다. 김씨는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한 번씩 보이면 정말 뿌듯하고 반갑다”며 웃었다.

하지만 김씨 같은 봉제사들이 처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하루 벌이는 여름·겨울 시즌을 준비하는 성수기 기준 14만~15만원으로 10년 전과 비슷한 수준이다. 대부분 봉제사는 4대 보험 같은 장치 없이 일한 만큼 돈을 받는다. 그런데 일감이 줄고 있다. 업계 ‘큰손’인 패션 대기업이 중국 등 생산 비용이 저렴한 국가로 눈을 돌린 탓이라고 했다. 젊은 층 유입이 줄며 고령화도 빠르다.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 봉제 산업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1만6312명) 중 50~60대 비율이 약 80%였다. 20~30대는 7.5%에 그쳤다. 김씨는 “이걸 배우려는 젊은 사람들이 없어 기술이 그냥 사라질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김씨는 1987년 종로 5가에 있는 교실 하나 크기 공장에서 봉제 일을 시작했다. 설빔이나 꼬까옷이 팔리는 명절쯤에는 일요일도 없이 하루 15시간 일하는 날도 있었다. 월급은 11만원이었다. “선숙이는 손이 빠르고 꼼꼼하네”라는 칭찬을 들으며 2년 만에 미싱 앞에 앉는 정식 재봉사가 됐다. 월급도 20만원으로 올랐다. 2000년대 초·중반까지 패션 산업이 성장하며 김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 1주일에 70만원을 번 적도 있다. 당시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던 남편 월급이 130만원이던 때였다.

봉제 업계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걸 느낀 건 2007년 자기 봉제 공장을 차린 직후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며 일감이 더 급격히 줄었다. 빚이 쌓였고 결국 2014년 공장 문을 닫고 개인 봉제사로 돌아갔다.

지금도 원단을 옷 모양대로 사이즈에 맞춰 잘라 주는 ‘재단’ 작업까지는 기계가 할 수 있지만, 옷의 직선과 곡선을 넘나들며 재봉하는 건 여전히 사람 몫이라고 한다. 봉제 산업에서 경쟁력을 갖춘 고품질 의류가 나오게 하려면 생산 현장의 숙련된 경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김씨 역시 서울의 한 대학 패션·의류학과 의뢰를 받아 학생들에게 “곡선을 강조한 디자인이니 하늘하늘한 원단을 써 보자”는 식의 현장 경험을 전수한 적도 있다.

윤혜준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수십 년간 손기술 하나로 먹고살아 온 우리나라 봉제 기술자들 솜씨를 이어가지 못한다면 앞으로 세계에서 경쟁할 고급 의류를 생산하는 역량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팀장=정한국 산업부 차장대우

조유미·김윤주 사회정책부 기자

김민기 스포츠부 기자

한예나 경제부 기자, 양승수 사회부 기자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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