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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단독]"100억 날린 친구, 죽었을까봐 매일 전화해"[주가조작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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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⑴"가치투자라고 생각했다"

강남 고소득층 대상으로 투자자 모집

수익 분배는 커녕 빚만 남아

재범률 높이는 솜방망이 처벌 강화해야

"투자를 권유한 친구한테 매일 전화해. 혹시 죽었을까 봐…. 그 친구는 100억원 가까이 날렸어."

'라덕연 게이트'로 신용불량자 처지로 내몰린 이모씨는 힘겹게 입을 뗐다. 몇 번의 설득 끝에 가까스로 인터뷰에 응한 그를 14일 오후 서울 강남의 모처에서 만났다. 60대인 그는 어떻게 라덕연 수법에 걸려들었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2022년 12월 투자할 곳을 찾는 그에게 친구가 가치투자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 명의로 개통한 휴대폰을 넘겨주면 알아서 저평가된 주식을 찾아 대신 투자해주고 수익이 나면 절반을 나눠 가져가는 구조라고 했다. 부동산 경기가 꺾이고 금리가 오르기 시작하면서 자산시장 침체가 본격화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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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의 모처에 만난 라덕연 주가조작 사건 피해자가 피해 내용과 사건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young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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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투자라고 믿었다…시세조종 여부 인지 못 해
"투자 대행업이라고 생각했어. 나도 자산운용사와 거래하는데 운용사가 어떤 주식을 사고파는지 내가 물어보면 말하지, 다 알아서 하잖아. 이런 개념으로 이해했어."

투자업계에서 이름을 날린 작자도 아니고, 투자자산 운용 펀드매니저 자격증이 전부인 라덕연 호안투자자문 대표에게 수억 원이 넘는 투자금을 믿고 맡겼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그는 "투자자 모집의 출발이 병원"이라고 했다.

라덕연 일당의 주가조작에 가담해 투자자를 모은 혐의를 받는 현직 병원장 주모씨가 의사들을 끌어들였고 라덕연이 합법적으로 서울 강남의 골프장을 인수했다. 그리고 이곳을 투자 유치 장소로 활용했다. 라덕연 일당은 강남 고소득층·전문직들의 '끼리끼리 문화'를 파고들었다. 그들만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구별 짓기 문화'도 투자자 유치에 불을 댕겼다.

"서로 만나게 된 것이 최고경영자(CEO) 모임이었고 라덕연 일당한테 투자를 맡긴 90%가 의사 포함한 사업가야."

라덕연이 그 휴대폰을 가지고 서울 강남구 청담동 등 8개 지역을 돌며 통정매매를 일삼았다는 사실은 라덕연이 구속되고 나서야 알았다. 가치투자가 아닌 시세조종에 투자금이 투입됐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했다. 자신의 주식계좌나 신분증을 라덕연 일당에게 맡겼지만 시세조종 여부는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가가 팍 오르지도 않았어. 꾸준히 1~2%씩 오르니 주가조작에 얽혀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지. 보통 주가조작은 한꺼번에 주가 확 올리고 빠지고 하는 식이니깐."

시세조종에 동조했다, 개인의 탐욕이 부른 화라는 사회적 시선에 '나도 시세조종의 피해자'란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지금도 휴대폰을 건네 투자 대열에 합류한 이들을 온전한 피해자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전자금융거래법은 공인인증서나 계좌 비밀번호 등 접근매체를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받아선 안 된다고 규정한다. 이를 어기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저쪽에서 돈을 운영해 준다고 했어. 내가 들고 있는 통장을 갖고 운영하니까 장난을 칠 수가 없다고 했어. 나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이용해 매매하는 줄 알았다니깐."

돈을 직접 빌려주면 떼일 우려가 있지만, 투자금이 묶여있는 통장을 본인이 들고 원금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으니 사기 칠 여지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는 금융결제원이 운영하는 어카운트인포 애플리케이션(앱)에 수시로 들어가 잔고를 확인했고 잔고 변동 폭이 크지 않자, 믿고 맡겼다고 했다.

주주총회 통지서를 받아보고서야 라덕연이 어떤 종목에 투자했는지 인지했다. 그는 지난해 초 라덕연 일당에게 투자한 종목 정보를 공유해 달라고 요청했고, 휴대폰도 돌려받고 싶다고 보챘다. 돌아온 대답은 그럴듯했다. "이 종목이 좋은 종목이라고 생각해서 너도나도 투자하면 시장이 교란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 말을 믿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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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덕연이 동의없이 신용쓰고 CFD까지 손대…남은 건 -3억2000만원이 찍힌 계좌
라덕연에게 투자를 맡긴 대가는 가혹했다. "주식을 10년 넘게 해왔어도 신용을 써본 적이 없었어. 원금에 대해선 욕심부린 대가라고 쳐. 적어도 신용 부분에 대해선 증권사에서 신용 써도 되냐고 전화 한 통 없었어." 그는 이 대목에서 화를 참지 못한 듯 목소리가 격앙됐다.

라덕연은 그의 동의 없이 신한투자증권에서 신용을 썼고 최초 2억원이었던 잔고는 원금에, 빚까지 보태져 있었다. -3억2000만원. 갑자기 벼락을 맞듯, 원금이 날아갔고, 신용대출 이자까지 떠안았다. 주가 상승에 따른 수익 분배는 단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온 집안을 다 뒤져 신한투자증권에 가입할 때 보냈던 서류를 찾아냈다. 신용을 쓰겠다는 동의란에 본인이 체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증권사에 신용융자거래가 이뤄지는 과정에서의 절차상 문제를 지적했다. 금융감독원에는 동의 없이 라덕연이 끌어다 쓴 신용 부분에 대한 빚이라도 유보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라덕연이 투자자 동의 없이 신용을 쓰고 차액결제거래(CFD)를 허락받지 않고 운영한 게 자기 잘못이라고 사인한 문서를 써줬어. 증권사에 소송하고 싶어도 돈 때문에 엄두가 안 나."

증권회사는 기다렸다는 듯 가압류와 경매를 걸어 협박하고 채권추심에 넘겼다. 날마다 증권사로부터 빚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우울증에 걸렸고 신용사회에서 퇴출당했다. 본인 명의의 신용카드를 쓰지도 발급받지도 못하게 됐다. "현금을 안 받는 곳도 많아. 한 번은 친구들과 차를 타고 가다가 하이패스가 찍히지 않더라고. 그때 카드 거래가 막힌 걸 안거야. 얼마나 창피하던지."

그는 그나마 피해 사정이 나은 축에 속한다고 했다. "피해 본 투자자 중에 100억원 넘게 날린 사람도 다섯 명은 돼."

"피해 금액이 1억원인 친구가 그러더라고. 본인은 부천에 살아서 그나마 피해를 덜 봤다고." 서울 강남의 청담동 골프장을 주가조작의 근거지로 삼은 라덕연 일당이 경기 부천은 거리상의 이유로 자주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한테 피해 사실 차마 알리지 못해…집까지 다 날린 사람들 수두룩
"CFD를 한 친구들은 원금에 미수금까지 더블로 마이너스가 났어."

130억원을 투자한 지인은 260억원으로 손해가 불어났고 30억원을 맡겼던 사람은 60억원의 빚을 떠안게 됐다. 지난 1년 동안 겨우 1심 재판이 진행됐고 그사이 누군가는 집이 날아갔다. 사업을 하던 사람들은 대출 이자를 못 내자 연장이 거부돼 돈줄이 막혔다.

"실제로 80억원 정도 손해 본 지인이 있었는데 자산이 강제 처분되면서 실제 날아간 재산이 200억원이야."

"아들, 친구한테도 라덕연 주가조작으로 돈을 날렸다고 말 못 했어…." 지난 일 년의 모진 세월을 얼굴에서 지워내려는 듯 짙게 화장한 그의 얼굴에 일순 그늘이 졌다. 사회로부터 신용불량자라는 딱지를 얻고 가족과 친척, 지인들과도 관계가 단절되면서 그들은 가정과 사회로부터 서서히 고립돼 갔다.

"아들, 딸, 친척 돈까지 끌어다 쓴 사람은 자식들 집까지 다 날렸어. 친구였던 사이가 서로 죽일 놈·죽일 년이 됐지. 내 친구가 나를 소개해서 100억원을 날리면 그 친구가 예쁘겠어?"

그는 작년 4월24일 다우데이타, 서울가스, 삼천리 등 8개 종목의 시세가 동시다발적으로 하한가를 기록했던 때를 떠올렸다. "우리가 가장 크게 분노하는 부분이 하한가 8개 종목의 오너들이야. 투자자들이 날린 돈이 8000억원인데 김익래 전 다우키움그룹 회장은 차익실현 했잖아. 우리를 죽게 만들어서 번 돈이야. 600억원 환원한다며? 아직 깜깜무소식이잖아."

김 전 회장은 SG증권발 폭락사태가 있기 이틀 전 매도로 600억원대 차익을 얻은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됐다. 이후 김 전 회장이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고, 검찰도 관련 수사에 나섰지만 김 전 회장에 대한 소환 조사는 없었다.

그는 시세조종 등 불공정행위와 관련된 처벌이 지나치게 가볍다고 지적했다. "너무 처벌이 약하니깐 처벌해도 사기를 치고 또 치고 하는 거야. 권도형이 왜 우리나라로 기를 쓰고 오려고 하겠어. 이게 진짜 문제야."

악질적인 증권 범죄를 저질러도 최대 15년의 징역만 살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라덕연이 또 사기를 안 칠까? 우리나라 법은 경제사범에게 너무 약해. 개인들만 피해 보고 불신의 사회가 되는 거야. 주가 조작하다 걸리면 인생 끝나는구나. 본때를 보여줘야 해."

한 시간에 걸친 인터뷰 끝에 그가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한 처벌 강화였다. 사기꾼이 투자자로 둔갑해 투자금을 편취하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자신과 같은 마이너스 인생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였다.

편집자주주가조작 관련 범죄 중 역대 가장 큰 규모(부당이득 합계 7305억원)의 '라덕연 게이트'가 발생한 지 1년(2023년 4월24일)이 되어가고 있으나, 여전히 피해자들의 악몽은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자본 시장에 실효성 있는 피해자 방안은 없습니다. 소송밖에는 답이 없으나 비용 부담과 피해 입증 어려움으로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라덕연 게이트'로 형사처벌의 한계점을 보완하고 실효성 높은 금전적 제재를 도입한 자본시장법 개정은 의미가 크지만 다양한 형태로 지속해서 증가하는 증권 범죄를 근절하려면 이를 효율적으로 적발·조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신속·엄정한 제재를 위한 추가 제도개선이 필요합니다. 아시아경제 증권자본시장부 특별취재팀은 해외 자본시장 선진국의 제도를 살펴보고, 증권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 우리 시장의 과제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점검해 봅니다. 또한 지능적·조직적인 범죄행위가 발생하는 만큼 투자자의 피해구제를 위한 실효성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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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정보 이용, 부정거래, 시세조종, 보고의무 위반 등 각종 불공정 거래와 관련해 다양한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보도할 예정입니다. 자본 시장 범죄 근절을 위한 종합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제보(lsa@asiae.co.kr)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취재해 보도하겠습니다.

<특별취재팀> ▲팀장 이선애 부장 △김민영 황윤주 차민영 김대현 기자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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