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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민주당이 철회한 총선 공약, ‘비동의 강간죄’ 팩트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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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강간죄\'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와 여성시민사회 243개 단체가 지난해 7월 서울 영등포구 국회 본관 앞에서 형법 297조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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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총선을 앞두고 ‘비동의 강간죄(간음죄)’ 입법을 둘러싼 논란이 되풀이 되고 있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이 입법 반대 뜻을 밝히고, 더불어민주당이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총선 10대 공약 중 하나로 제시했다가 “실무적 착오”라며 철회한 것이 논란을 재점화한 것이다. 여성단체들은 “(정치권이) 성폭력 현실을 모르거나, 적극 외면하거나, 성폭력 피해를 겪고 있는 시민이 아니라 성폭력을 행하는 사람에게 감정이입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비동의 강간죄’는 상대방의 동의가 없거나, 상대방의 의사에 반해 이뤄진 성관계를 성폭력 범죄로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현행 형법은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가해자의 폭행·협박’ 등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실에선 강요와 속임, 지위 이용, 폭언, 괴롭힘, 경제적 속박 이용, 술과 약물에 의한 성폭력이 비일비재한데, 법이 이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시대적 변화 속에 최근 들어 강간죄를 폭넓게 해석하는 판례가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강간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 있어야 한다는 게 대체적 분위기다. 이 때문에 여성계와 법조계 등 일각에선 강간죄 구성요건을 ‘피해자의 동의 여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제기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비동의 강간죄 도입 여부는 이번 총선의 주요 관심 사항 중 하나로 떠올랐다. 하지만 원내정당 10곳 가운데 이번 총선에서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한 정당은 녹색정의당이 유일하다. 원내 1당인 민주당은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10대 공약으로 제시했다가 “당내 이견이 상당하다”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된 비동의 간음죄 정책공약을 철회했다. 2020년 총선 때 ‘비동의 강간죄 도입 검토’를 공약했던 민주당은 21대 국회 임기가 만료되도록 별다른 논의도 하지 않다가, 이번 총선 때는 아예 공약에서 빼버린 것이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은 아예 명시적으로 비동의 강간죄 도입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26일 비동의 강간죄 도입 반대 의사를 밝히며 내세운 이유는 “억울한 사람이 양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천하람 개혁신당 총괄선거대책위원은 “지금도 (성범죄) 피고인이 사실상 (무죄) 입증 부담을 지고 방어권 행사에 곤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비슷한 이유를 들었다. ‘피해자의 말만으로 처벌된다’는 이런 논리는,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반대하는 쪽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주장이다.



한겨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겸 상임공동선대위원장(왼쪽)이 지난 24일 오후 서울 서초구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오른쪽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 선거대책위원장이 28일 오전 서울 마포구 망원역 인근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모습.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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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죄에 동의 개념 명시’는 국제적 추세





하지만 선행 연구를 비롯해 우리나라보다 비동의 강간죄를 먼저 도입한 다른 나라들의 사례만 보더라도, 이런 논리는 구체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막연한 우려에 불과하다. 오히려 강간죄에 동의 개념을 명시하는 것이 국제 기준으로 자리 잡아가는 추세다.



2018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피해자 동의 여부에 중점을 두도록 강간죄 구성요건을 개정하라고 권고한 바 있고, 영국과 독일, 스웨덴, 캐나다 등은 피해자 동의를 중심으로 성폭력법 체계를 바꿔가고 있다.



한 예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20년 펴낸 ‘비동의 간음죄의 비동의 판단 기준 마련을 위한 국내외 사례연구’ 보고서를 보면, 2003년 비동의 강간죄를 도입한 영국은 성폭력 사건에서 상대방이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이 있었는지, 동의할 자유가 있었는지, 가해자가 상대방의 동의 여부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모든 성행위에 대한 동의가 이뤄졌는지, 가해자가 상대방의 취약성을 이용한 것은 아닌지 등 피해자 진술 외 여러 정황을 강간죄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특히 비동의 강간죄가 도입되면 ‘성범죄 무고’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9년 10월 발간한 ‘디지털 성폭력 범죄, 성폭력 무고죄를 중심으로’ 보고서를 보면, 2017∼2018년 성폭력 무고 피의자 1190명(경합범 제외) 중 기소돼 유죄가 선고된 사례는 전체의 28.7%(341명) 수준이다. 60.3%(718명)는 수사 결과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같은 기간 검찰에서 수사한 성폭력범죄 피의자가 8만명 이상이고 불기소 처분 인원 수가 3만명을 넘는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성폭력 사건 중 무고 사건 비중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피고인의 유무죄 입증 책임이 검사가 아닌 피고인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경환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는 “동의를 기준으로 강간죄를 개정해도 검사가 ‘(피고인이) 피해자의 동의 없이 성행위를 하였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입증 책임의 문제는 범죄 구성요건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여부와 관계가 없다”며 “검사가 ‘피해자의 동의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동의 기준으로 강간죄를 개정한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비동의 강간 도입돼도 ‘성범죄 무고’ 늘어나지 않아





일각에서는 최근 성범죄 재판에서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는지 여부가 아니라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강간죄 구성요건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여전히 최협의의 폭행·협박 여부만 판단해 피해자의 동의 여부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판결이 많다”고 반박했다. “‘피고인이 피해자 의사에 반해 피해자를 간음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하지 않았다’며 무죄 판결을 선고”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입법을 통해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단체 등은 ‘젠더 갈라치기’ 분위기를 만들며 표심을 좇아 비동의 강간죄 도입을 외면하고 있는 정치권에 분노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등 전국 403개 단체는 공동 성명을 통해 “국민의힘, 더불어민주당, 개혁신당은 성폭력 현실을 모르거나, 적극 외면하거나, 성폭력 피해를 겪고 있는 시민이 아니라 성폭력을 행하는 사람에게 감정이입하고 있다”며 “우리는 여성과 피해자를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전제하는 사회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1953년 형법 제정 때부터 70년 넘게 유지돼온 강간죄 구성요건이 “성폭력법의 보호법익과도, 성폭력 현실과도, 국제적 기준과도 다르다”며 “‘형법 297조 강간죄’ 개정은 22대 국회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핵심과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젠더 갈라치기가 아니라 평등한 성적 시민들의 관계맺기를 우선하는 후보와 정당을 찍겠다”며 “31일부터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바꾸고 성평등 전담부처 강화에 함께 할 우리동네 국회의원 찾기! #CALL22nd: 나는 오늘 성평등에 투표합니다’ 캠페인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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