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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8000년 와인 역사…이곳에 오면 누구나 술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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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째 신혼여행 ⑪ 조지아



중앙일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전경. 고대 요새이자 지역 최고의 전망대로 통하는 ‘나리칼라’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조지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 중 하나다. 중앙의 황금 지붕 건물이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성 삼위일체 성당(사메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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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란 나라가 있다. 캔커피 이름이냐고? 지도를 펼쳐보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동유럽과 서아시아 경계에 조지아가 있다. 조지아는 8000년 역사를 가진 와인의 본고장이자, 모든 음식이 와인과 어울리는 신묘한 미식의 나라다. 그곳에서 한 달을 살았다. 조지아에 있는 동안 체중이 5㎏이 늘었다.

아내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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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삼위일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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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탐이 있는 편이다. 자고로 음식 앞에서는 누구나 가장 솔직한 모습이 나온다고 믿는다. 나는 맛있는 걸 먹으면 남들보다 적어도 두 배쯤 행복해진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의 한 달 살기는 먹고 마시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어쩌면 내 행복의 절반은 2022년 4월 조지아라는 낯선 땅에 두고 온 것만 같다. 트빌리시에 머물며 매일 한 병 이상의 와인을 마셨으니, 다 합치면 서른 병쯤 되려나.

조지아 와인은 대략 8000년의 역사를 헤아린다. 그 까마득한 시절 이 땅의 사람은 오크나 스테인리스 탱크가 아니라 거대한 토기에 와인을 만들어 놓고 숙성시켜 먹었다.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데, 조지아 특유의 크베브리(Qvervri, 계란 모양의 큰 토기) 와인이다. 과거 한국에 집집마다 된장 항아리가 있었듯이 조지아 가정에는 이 와인 항아리가 가족 수만큼 있다. 자식이 태어난 해에 와인 항아리를 묻고 성인이 되면 꺼내 마시는 식이다. 크베브리 와인은 떫은 맛을 내는 타닌 성분이 높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그 거칠고 텁텁한 맛이 내게는 몹시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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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숙성을 위한 전통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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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한 현지 음식은 ‘시크메룰리(Shkmeruli)’다. 입에 넣는 순간, 단번에 한국인을 위한 완벽한 와인 안주란 생각이 들었다. 튀긴 닭에 마늘과 크림소스. 이 세 조합에 딴지를 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토기에 담아 오븐에서 익힌 이 전통 음식은 그 자리에서 와인 한 병을 비우게 한다. 한국에 돌아온 요즘도 옛날 통닭을 사다 마늘과 크림소스를 붓고 그 맛을 흉내 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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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베브리 와인은 타닌 성분이 높아 텁텁한 맛이 강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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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에서는 트래킹을 하러 갈 때도 와인과 함께였다. 평소 음주에 관해서는 엄격한 편이라 정상에서도 막걸리, 하산해서도 막걸리를 찾는 한국 어르신의 등산 문화를 영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런 내가 고된 산행 끝에 와인 한 모금이 주는 달콤함에 눈을 떠버린 것이다. 해발 2200m 카즈베기에서 내려온 뒤 먹었던 시크메룰리와 와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조지아가 내게 준 행복의 절반이 그 한 잔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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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요리 ‘시크메룰리’.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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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 약한 편이다. 조지아 와인에 빠진 아내는 점심부터 코르크 따는 일이 적지 않았기에, 이번 여행은 내가 주도하는 날이 많았다. 일단 더 술기운이 오르기 전에 집 밖으로 아내를 끌어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조지아는 대한민국의 3분의 2 크기다. 수도 트빌리시에서 한두 시간 사이에 다녀올 만한 근교 여행지도 많다. 트빌리시로부터 약 100㎞ 떨어진 시그나기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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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의 요새 도시 시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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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나기는 인구 15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의 자랑은 크게 두 가지다. 일단 ‘사랑의 도시’라는 타이틀이 유명한데, 미국 라스베이거스처럼 24시간 혼인신고가 가능하다. 시그나기 지역은 예부터 외세의 침입이 잦아, 해발 800m 언덕에 오랜 시간에 걸쳐 요새를 만들었단다. 저 멀리 적이 보이면, 살아남기 위해 성안으로 모이곤 했다는데 그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사랑을 고백했던 걸까. 오지의 작은 마을까지 손을 잡고 왔을 연인을 생각하면 언제가 됐든 당장 혼인 서류에 도장을 찍어줘야 할 것 같긴 하다.

또 다른 자랑은 죽어서야 조지아의 국민 화가로 불리게 된 니코 피로스마니(1862~1918)다. 니코는 시그나기 인근 미르자니 마을에서 자랐는데, 그의 러브 스토리는 한국에도 제법 알려져 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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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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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화가 니코는 우연히 마을을 찾은 한 프랑스 배우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져 버린다. 꽃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니코는 전 재산과 피를 판 돈까지 탈탈 털어 백만 송이 장미를 선물하였으나…. 그의 그림도, 사랑도 살아서는 인정받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심수봉이 부른 ‘백만 송이 장미’가 이 슬픈 이야기를 우리말로 옮긴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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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영 디자이너


마침 은덕의 술버릇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고, 또 마침 그의 18번이 ‘백만 송이 장미’였던 터라 이 곡은 내게도 익숙했다.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꽃을 피우면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라는 노랫말이 와 닿지 않았는데, 시그나기에서 그 아리송한 가사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도 와인 한 병을 깠다.

☞조지아 트빌리시 한 달 살기· 비행시간: 14시간 이상(직항은 없고 튀르키예나 폴란드 등을 경유해야 함) · 날씨: 한국과 비슷함, 봄과 가을 추천 · 물가: 태국 방콕 수준(특히 와인이 저렴) · 숙소: 300달러 이상(집 전체, 대사관이 몰려 있는 부촌 바케 지역은 500달러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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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덕·백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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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김은덕·백종민 여행작가 think-thi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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