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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이슈 국방과 무기

해병대의 첫 승리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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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는 1949년 4월15일 경남 창원 덕산비행장에서 창설됐다. 덕산비행장은 오늘날 진해 해군기지 안에 있어 진해 해군비행장(Jinhae Naval Airfield)으로 불린다. 해병대를 신설한 것은 상륙작전 때문이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여건상 평상시 해군과 함께 움직이다가 결정적인 순간 신속히 육지에 상륙해 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부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출범 당시 해병대는 단출했다. 장교와 부사관, 병사를 더해 총원이 380여명으로 대대급 규모였다. 자연히 초대 사령관 신현준의 계급도 대대장급인 중령에 불과했다. 물론 해병대의 몸집이 차츰 커지며 그는 별 셋 중장까지 진급하고 1961년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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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 월명공원에 세워진 6·25전쟁 당시 해병대 군산·장항·이리 지구 전투 전적비. SNS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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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창설 이듬해인 1950년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6·25전쟁이 터졌다. 개전 3일 만에 한국 수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그 뒤로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 7월 초 충남 천안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데 이어 중순에는 호남마저 위태로워졌다. 이에 군은 제주도에 주둔하던 해병 부대를 최전선으로 보내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시간을 끌기로 결정한다. 7월13일 해군 함정을 타고 제주를 떠난 해병대는 16일 전북 군산에 상륙했다. 이후 금강을 건너 충남 장항 북방 4㎞ 지점에서 의기양양하게 남하하던 적군과 조우했다. 예상치 못한 해병대의 기습은 북한군을 당혹스럽게 했다. 적군 사상자는 무려 370여명에 달했다.

더 중요한 성과는 북한군의 금강 도하작전을 지연시킨 점이다. 해병대는 7월20일까지 금강을 방어하며 북한군이 노린 우리 정부 소유의 물자, 특히 쌀 등 식량을 확보한 다음 해군 함정에 실어 무사히 남쪽으로 보냈다. 이 물자를 적에게 뺴앗겼다면 한국군은 1∼2개월 뒤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식량 부족 등으로 전투력이 고갈되었을지도 모른다. 해병 부대 1진이 물자와 함께 바다로 철수한 뒤에도 일부는 남아 전북 이리 부근에서 북한군과 치열하게 싸워 아군의 안전한 퇴각을 도왔다. 군산·장항·이리 지구 전투는 6·25전쟁 당시 해병대가 거둔 첫 승리로 기록됐다. 오늘날 군산 월명공원에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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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전쟁 영웅’으로 선정된 고길훈(1922∼1981) 해병 소장. 국가보훈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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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부는 4월을 맞아 군산·장항·이리 지구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길훈(1922∼1981) 장군을 ‘이달(4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 전투 당시 소령 계급이었던 고 장군은 전후에도 해병대에 남아 별 둘 소장까지 진급하고 1963년 전역했다.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받은 고 장군은 별세 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오는 15일은 1949년 출범한 해병대 창설 75주년이 되는 뜻깊은 날이다. 그 사이 대대급에 불과했던 병력은 2개 사단을 거느린 2만9000명 규모로 성장했다. 고 장군의 ‘전쟁 영웅’ 선정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이 순국선열을 기리고 또 해병대 장병들을 격려했으면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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