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8 (화)

이슈 뮤지컬과 오페라

입센 연극 ‘욘’, 노르웨이 말에서 첫 번역된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역을 맡은 배우 이남희.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바깥은 벚꽃 피는 봄날인데 세종문화회관 엠(M)씨어터에 들어가면 어둑하고 칙칙한 무대다. 오는 21일까지 이곳에서 이어지는 연극 ‘욘’은 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만년에 쓴 희곡을 서울시극단 고선웅 단장이 각색하고 연출했다.



입센은 전 세계에서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자주 공연되는 극작가. 하지만 국내에선 ‘인형의 집’ ‘유령’ 등 외엔 자주 접하기 어려웠다.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었다는 게 원인 가운데 하나였는데, ‘욘’은 입센 작품 가운데 노르웨이어 원작을 직역해 올린 국내 첫 연극이다. 15년 동안 입센의 모든 희곡 23편을 번역한 김미혜 한양대 명예교수가 연극 전반을 자문하는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다.



한겨레

연극 ‘욘’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찬란했던 과거 영광만을 더듬으며 허세에 찌들어 칩거하는 남자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탁월한 수완으로 은행장에 올랐지만, 횡령 사건에 휘말려 8년의 옥살이 이후 다시 8년을 집에 틀어박혀 가망 없는 재기를 꿈꾼다. 아내 귀닐은 남편에 대한 환멸 속에 아들 엘하르트에게 집착하고, 젊은 날 욘에게서 버림받은 귀닐의 쌍둥이 언니 엘라는 뒤틀린 사랑을 자신이 키운 조카에게 투영한다.



아들이 아홉살 연상의 여인과 떠나버린 날 8년 만에 외출한 욘은 눈보라 몰아치는 산꼭대기로 올라간다. 8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이남희의 열연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고선웅 연출은 최근 간담회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 올라가는 욘의 모습이 슬펐다”며 “이 순간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하다 결국 흰 눈이 쏟아지는 장면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눈보라치는 고독 속에서’가 이 연극의 부제다.



한겨레

연극 ‘욘’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연출과 각색을 넘나들며 연극과 창극, 뮤지컬과 오페라를 종횡무진 해온 고선웅에게도 입센 작품은 처음이다. ‘고선웅표 연극’의 체취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리드미컬하게 끊어지는 대사에 비극적 상황에서조차 배시시 웃음을 자아내는 특유의 유머가 굽이친다. 연극은 일단 쉽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연극관이다.



연극의 원형에 대한 고선웅의 애착은 이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희곡에서 욘과 아내는 같은 집 2층과 1층에 각각 거주하면서도 서로 얼굴조차 보지 않는 관계다. 그런데 연극은 1층, 2층 구분이 없는 평면으로 무대를 구성해 욘과 아내가 바로 옆에서 연기한다. 관객은 연극적 상상력을 발휘해 2층의 욘과 1층의 아내를 구분해 관람하게 된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장면도 영상과 엘이디(LED) 등 다양한 기술적 시도를 배제한 채 다닥다닥 종이로 만든 큼직한 눈송이로 표현했다. 수백 년, 수천 년 전에 연극을 했다면 바로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된다.



‘인형의 집’ 등 여러 작품에서 입센이 주창한 개인 해방론의 흔적도 보인다. 아들에게 집착하는 부모의 기대를 배신하며 인습의 잣대를 뿌리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다.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이 사실 별 의미 없고 헛되죠.” 고선웅은 “사이좋게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작품”이라고 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세월호10년, 한겨레는 잊지 않겠습니다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