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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이슈 미술의 세계

절대자 향해 꼭 모은 두 손… 믿음, 열망이 되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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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 각자의 진실을 증언하는 회화

사람들, 불안·공포 탓 신앙 갖지만

추구하는 바 따라 듣고 싶은 것 들어

작가, 폐허 교회 다니며 잔해들 묘사

믿음에 대한 의문·진실의 이면에 천착

20여점 근작 속 각자의 진리 찾아가

◆믿음에 대하여

온전히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공포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구원의 존재를 갈망하도록 만든다. 그 존재는 삶의 단계에 따라 부모와 스승의 이름으로, 동료와 벗의 이름으로, 때로는 신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온다. 신앙은 언어로써 전파되었다. 음성으로, 문자로, 또는 그림으로 그 형태를 달리하며 듣는 자의 머릿속을 울리는 미지의 목소리로써 수 세기간 다양한 문화권을 아우르며 전승되었다. 목소리를 실어 나르는 매체가 무엇이든 그 울림을 받아들여 내면에 새기도록 하는 것은 언제나 청자의 신체이거나 정신이다. 그러니 신이 가라사대,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세계일보

‘주어진 페이지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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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38)의 개인전 ‘귀 있는 자(Has an Ear)’가 5월11일까지 삼청동 갤러리 기체에서 열린다. 김성우(43) 큐레이터의 기획으로 이동혁의 근작 회화 2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모태신앙으로 유년기부터 종교를 가까이 한 작가는 지난 수년간 전국 각지의 폐허가 된 교회를 방문하여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회화의 화면 위에 담아 왔다. 한때 신성한 빛으로 가득하던 장소의 쓸쓸한 잔해를 디디고 이내 조각난 신전의 검은 껍데기를 성상처럼 묘사하면서, 그 모든 신비는 언제 어디로 떠나갔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더이상 목격되지 않는 절대적인 무엇의 부재로부터 내심 안도하기도 했단다. “발화가 불가능한 상태인 존재로서 지칭되는” 듣는 자의 귀는 사실 자신이 추구하는 진실에 따라 듣고 싶은 것을 듣는다. 두려움에 떠는 자, 확신하는 자, 의심하는 자의 영혼을 지나는 소리가 저마다 그 울림을 달리하는 탓이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믿음과 잡히지 않는 소망을 쌓고 무너뜨리는 것은 늘 인간사에 의한 것이다. 신자가 떠난 예배당에는 어김없이 현실의 먼지가 자욱이 내려앉는다.

세계일보

왼쪽부터 ‘주어진 페이지 4’(2024), ‘주어진 페이지 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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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대하여

‘주어진 페이지(Given Page)’(2023∼2024) 연작의 화면 위 말과 양, 일곱 개의 촛대, 붉은 천과 기도하는 손, 천사의 날개 등 상징적인 도상들이 서로 기이하게 뒤엉킨 모습으로서 등장한다. 주로 성경 내용에 기반을 둔 이동혁의 도상들은 형태와 구조의 변형에 따라 오래된 상징성으로부터 이탈한다. 전시를 기획한 김성우 큐레이터에 따르면 “전쟁과 기근, 죽음 등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심판과 인류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거나, 순결과 승리, 정의를 나타내며 최종적인 승리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던 말의 도상은 다른 사물이나 동물의 형상과 뒤엉키고 어두운 배경의 심연으로 고개를 숨기며, 심지어 다른 화면에서는 그 동세만을 일부 다시 드러내는 식으로 출현한다. 이 과정에서 공동이 합의해 온 상징적 가치는 무의미해지고, 의미가 모호한 허물로만 남겨진다.”

‘주어진 페이지 1’(2024)과 ‘주어진 페이지 19’(2024) 등 다각도에서 포착한 여러 대상의 모습을 하나의 덩어리로 결합해 묘사한 전체의 형상은 신화적이고도 서사적인 이야기 구조를 연상시킨다. 한편 ‘주어진 페이지 15’(2024)에서와 같이 특정 장면을 여러 캔버스 위에 분절하여 묘사한 구성은 극도의 근접화면을 관객 앞에 내보임으로써, 구조적 외양을 낯설게 하는 동시에 대상에 내재한 정서를 강화한다. 예컨대 깍지 쥔 손의 형태는 일그러지고 뒤엉켜 본연의 생김새로부터 멀어지는 한편 오직 열망에 가까운 믿음을 암시하는 정동적 덩어리로서 남겨지는 것이다.

일련의 연작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금빛 촛대의 도상은 화면 내부를 분할 및 구획하는 구성 요소이자 복수의 화면을 외부적으로 연결 짓는 복선으로서 역할한다. 촛대는 매번 상이한 방향과 거리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묘사되어, 현상을 대하는 관점에 따라 진실은 매번 다르게 목격된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회화의 화면이 어떠한 사건을 목도한 한 발화자, 즉 작가의 증언이라면, 그 화면을 대하는 또 다른 청자, 즉 관객이 화면을 바라보며 새로운 해석을 해내는” 과정의 형상화인 것이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듣는 이의 입장에 따라 진실은 때마다 달리 진술된다.

세계일보

이동혁 개인전 ‘귀 있는 자’(2024) 갤러리 기체 전시 전경. 왼쪽 4점은 ‘주어진 페이지 23’(2024), 오른쪽 1점은 ‘주어진 페이지 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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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에 대하여

이동혁은 전시에 선보인 근작이 “글이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주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경이 그렇듯 원문을 다른 언어로 옮겨 내는 번역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탈락되거나 변형되었을 의미의 가능성을 주지하면서 그러한 번역의 행위를 회화의 방식으로 재현해 보이는 시도다. “글에 묘사된 정확한 상황이나 의미를 고정된 하나의 이미지로 전달하기보다 복수의 화면이 맺는 관계를 통하여 의미가 재맥락화 되는 부분에 초점을 잡고 작업”했다.

그의 붓은 색채를 거듭 문대어 형상 속에 새겨 넣으며 지나는 궤적마다 모래알 같은 흔적들을 남기고 간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형태를 확인하는” 마음으로 그린 화면은 마치 흙을 빚어 바른 듯이 촉각적이다. 표면과 무디게 마찰하듯 밀어내는 붓질은 미끈한 윤기를 휘발시키고 짙은 안료의 색채를 화면 깊이 물들인다.

믿음에 의문을 표하기 위하여, 진실의 이면을 돌아보기 위하여 이동혁이 선택한 발화의 매체는 회화다. 시각미술은 번역된 문자에 비해서도 무척이나 더 넓은 해석의 여지를 지닌 특별한 언어다. 이 감각의 번역본들은 대조할 원본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터라 오역과 의역을 바로잡을 여지조차 없다. 다만 열린 해석의 다양성 탓에, 그러한 회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든 화면은 이미 청자를 위하여 오롯이 남겨진 페이지이다. 마치 듣는 자의 귀가 스스로 신의 메시지를 해독하듯이, 누구나 다르게 증언하는 각자의 진실이 결국 그 자신에게는 진리이듯이.

이동혁은 1985년 인천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갤러리 기체(2024, 서울), 에이라운지(2022; 2020, 서울),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2018, 서울), 스페이스 나인(2018,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갤러리 기체(2023; 2021, 서울), 뉴스프링프로젝트(2023, 서울), 아트스페이스 호화(2023, 서울), 갤러리 구조(2023, 서울), 학고재(2021, 서울), 드로잉룸(2021, 서울)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2015, 파주), 갤러리 이마주(2013, 서울), 대안공간 루프(2012, 서울) 등이 개최한 단체전에 참가했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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