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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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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70% ‘결혼행진곡’ 연출가 전세권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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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연극 꽃피운 텃밭’ 극단 新協서 10·13·15대 대표 지내

조선일보

2020년 6월 9일 서울 은평구 자택에서 인터뷰한 극단 신협 전세권 전 대표. 이해랑연극상 특별상 수상자.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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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연극을 꽃피운 텃밭과 같았던 극단 ‘신협(新協)’의 전 대표 전세권(85) 연출가가 14일 오전 9시47분 별세했다.

1950년 국립극장 전속극단으로 출발한 신협은 이해랑, 김동원, 백성희, 장민호, 최은희 등 당대 최고 연출가·배우들이 활동하며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큰 물줄기를 형성한 연극 단체. 전세권은 신협 연수생으로 이해랑 선생에게 연극을 배워 조연출로 시작한 뒤, 10·13·15대 대표와 신협동우회장을 지냈다. 70여편의 연극·뮤지컬을 연출하고, 방송사 PD로도 ‘형사’ ‘산유화’ 등 인기 드라마를 만들었다. 2020년 이해랑연극상 특별상을 받았다.

◇“이해랑 선생은 영혼의 아버지”

전세권은 평소 “이해랑 선생은 영혼의 아버지, 신협은 마음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그의 아버지가 서울 불광동 2층 양옥집 데려가더니 연극 연출가 이해랑 선생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제 이 아이는 제 자식이 아니고 선생의 자식입니다. 연극인으로 키우십시오.” 이렇게 말한 뒤 아버지는 혼자 집에 돌아가버렸다. 까까머리 중학생 소년은 집에 돌아가 “도대체 무슨 말씀이냐”고 펑펑 울면서 따졌다. 생전의 그는 “그 때부터 신협은 내 고향, 이해랑 선생은 영혼의 아버지가 됐다”고 했다. 함경도 북청 출신인 전세권의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서울로 데려와 12년간 물지게를 지면서 공부시켰다. 하지만 공부를 마친 아버지는 유랑극단을 만들어 전국을 떠돌았다. 전세권은 “아버지가 해방 뒤 인쇄소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연극을 향한 꿈을 잊지 못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그에겐 일찌감치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연극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 연극을 꽃피운 텃밭, ‘신협’

‘신협’은 1950년 ‘민족 연극예술의 수립과 창조’를 목표로 설립된 국립극장의 전속극단. 우리 연극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인 이해랑과 김동원을 비롯, 백성희, 장민호, 최은희, 황정순 등 당대의 최고 배우와 스태프들이 신협에서 함께 연극을 만들었다. 우리 현대 연극을 꽃피운 텃밭과도 같았던 극단이다. ‘모든 신파적 요소를 제거하고 진정한 사실주의 연극’을 표방하며 셰익스피어, 사르트르, 몰리에르, 실러,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 유진 오닐, 헨릭 입센, 소포클레스 등의 외국 작품 뿐 아니라 대부분의 작품을 신협에서 상연한 동랑 유치진 선생과 차범석 선생 등 국내 최고 작가들의 최고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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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극단 신협이 대구에서 초연한 '햄릿'. 왼쪽부터 최무룡, 김복자, 김동원, 황정순. /이필동, '새로쓴 대구연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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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에 국립극단 ‘이민선 연출

6·25전쟁 때 그는 부산 피란촌 학교를 다녔다. 당시 중앙중·고와 보성중·고가 함께 수업을 했다. 보성의 교감은 훗날 홍익대 미대 학장을 지내는 화가 이마동 선생, 중앙의 교감은 연세대 철학과 교수를 지내는 김형석 선생이었다. 영어를 가르친 김형석 선생은 햄릿, 맥베스, 오셀로 같은 셰익스피어 작품 얘기를 많이 들려줬다. 19살 때 신협 연구생으로 들어가 이해랑 선생의 조연출로 현장에서 연극을 배웠다. 연극을 하는 틈틈이 시나리오를 썼다. 1962년엔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가작 당선작이 당대의 인기 배우 김승호, 황정순과 아역으로 안성기가 출연한 영화 ‘지게꾼’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영화의 신문광고엔 ‘조선일보 신춘문예 가작 당선작’이라는 광고 문구가 선명하다. 1966년엔 29살의 나이로 국립극단 작품 ‘이민선’의 당당한 연출가가 됐다. 이 작품의 첫 표를 산 사람이 스승 김형석 선생이었다.

◇관객 난입 인기 뮤지컬 ‘카니발 수첩’

그에 앞서 1965년에는 이해랑 선생의 뜻에 따라 ‘젊은 신협’ 성격의 극단 ‘제3극장’을 만들었다. 음악과 무용, 연극이 어우러지는 뮤지컬을 지향했다. 뮤지컬 ‘새우잡이’와 ‘카니발 수첩’을 연출한 것도 이 때였다. 특히 ‘카니발 수첩’은 장마철 명동 입구 기업은행 본점에서 국립극장(지금의 명동예술극장)까지 우산 쓴 관객이 장사진을 칠 정도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마지막날 입장 못한 관객들이 국립극장 유리창을 깨고 극장 안으로 들이닥쳐, 무대 주변과 객석 복도까지 모두 점령하고 관람할 정도의 인기였다. 전세권은 60여 년 간 70여 편의 연극을 연출했다.



◇장미희·한진희 ‘결혼행진곡’ 시청률 70%

문화공보부 특채로 KBS 드라마 PD로 들어가 TBC를 거쳐 다시 KBS에서 퇴임할 때까지 드라마 380여편을 연출했다. 장미희와 한진희가 주연한 국내 방송 최초의 주말 연속극 ‘결혼행진곡’이 평균 7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수사반장’과 쌍벽을 이뤘던 수사물 ‘형사’, 유동근 전인화가 출연한 ‘산유화’ 등 숱한 히트작을 만들었다.

전세권의 몸은 방송국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무대를 향했다. 그에겐 신협의 이름으로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이해랑 선생의 뜻을 받드는 길이었다. 이해랑 선생과 연극계 어른들이 그에게 신협을 맡겼다. 극단 대표를 맡은 뒤엔 방송사 PD 월급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연극 16편을 무대에 올렸다. 동덕여대 겸임교수를 할 땐 교수 월급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또 연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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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엔 연극학자 유민영 교수와 함께 국내 최장수 극단 신협(新協)이 걸어온 길을 정리한 책 ‘극단 신협 1947~2023′(스타북스)을 펴냈다.

유족은 부인 박옥련씨와 아들 인환 영화감독, 딸 인경씨, 사위 박정혁 미쓰이소꼬코리아 차장. 발인 16일 7시, 장례미사 16일 8시 명동성당, 장지 용인천주교공원묘원. (02)2072-2020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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