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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기후소송 승리 76살 슈테른 여사 “한국 청소년들, 용감해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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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엘리자베트 슈테른(맨 앞 오른쪽) 대표 이사를 비롯한 ‘스위스 기후보호를 위한 여성 시니어 클럽’ 회원들이 지난 9일(현지시각)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에서 열린 기후 정책 소홀과 관련한 정부 상대 소송에서 승소한 뒤 손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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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전 유럽인권재판소(ECHR) 판사 17명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들에게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서달라, 옳은 판결을 내리기 위해 용감해져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판사에게 역사의 올바른 편에 설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용감해지세요.”



‘스위스 기후보호를 위한 여성 시니어클럽’의 엘리자베트 슈테른(76) 대표이사는 지난 14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오는 23일 기후위기 헌법소원 첫 공개변론을 앞둔 한국의 청소년과 그들의 부모 등 기후시민들을 향해 이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에서 이뤄지는 이번 공개변론은 2020년 3월 청소년 원고 19명이 제기한 ‘청소년기후소송’을 포함해 총 4건의 기후소송이 병합되어 진행되는 것으로, 청구인들은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의 감축목표(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40% 감축)가 국제법이 요구하는 1.5도 온도 제한 목표에 부합하지 않아 생명권, 건강권 등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위헌을 주장하고 있다.



한국 청소년들이 소송을 제기했던 그해, 유럽인권재판소에서 기후소송에 나선 슈테른 이사 등 64살 이상 스위스 여성 2천여명은 지난 9일 ‘스위스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아 고령자의 인권을 침해했다’는 판결을 끌어냈다. 국제법원에서 기후변화와 관련한 특정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평균연령이 74살인 이들이 기후소송에 나선 건 “스위스 정부가 나날이 심각해지는 기후변화 속에서 목숨을 잃는 노인, 특히 여성 노인을 위한 정책을 펴지 않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국제학술지 ‘네이처 의학’에 실린 연구 결과를 보면, 2022년 유럽 폭염 사망자(6만1672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79살 이상 노인이었고, 여성 사망자가 남성보다 63%나 많았다.



슈테른 이사는 “2022년을 비롯해 지난 20년의 여름 동안 2003년 여름 폭염(약 7만2천명) 때보다 사망자 수가 적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 노인들이 기후위기 시대에 사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 방법은 “아무런 사회적 활동 없이 집에만 갇혀 사는 것”이었다. 기후변화에 취약한 여성 노인들을 정부가 제대로 보호하지 않는 사이,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았다는 얘기다.





한겨레

엘리자베스 스턴 ‘스위스 기후보호를 위한 여성 시니어클럽’의 대표 이사가 지난 14일 한겨레와 줌 인터뷰를 하며 재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줌 인터뷰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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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른 이사 등은 이런 이유를 들어 2016년 스위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스위스 연방행정법원은 고령 여성만 유독 기후변화로 인해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원고 적격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그는 “(당시) 법원은 ‘모든 것들이 기후변화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겨울 관광산업도 그렇다’고 말했다”며 “겨울 관광산업의 경제적 손실과 우리 목숨을 동일 선상에 놓고, 우리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 힘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달려간 유럽인권재판소는 다른 판단을 내렸다. 스위스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입법이나 필요한 조처를 제때 적절한 방식으로 하지 않아, ‘유럽인권협약 제8조’를 침해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슈테른 이사는 “9년 동안 기다린 판결을 듣는 순간 전율이 일었다”며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부분은 법원이 기후위기 대응을 인권(보호)이라 선언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소송을 통해) ‘늙은 여성은 방 한구석에 앉아 뜨개질이나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모든 여성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서사로 바꿨다”고 “그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웃었다.



이날 승소 판결이 전해지던 자리에는 ‘유럽 나라들이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않아 미래세대의 건강권을 침해했다’며 유럽 32개 국가를 유럽인권재판소에 제기한 포르투갈 청소년들이 함께 있었다. 이들은 그 몇 시간 전 각 나라의 국내 법원 판단을 받지 않은데다, 이들이 포르투갈 이외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당한 상태였다. 그는 “패소 소식을 들은 10대 여자아이 2명은 펑펑 울면서도 우리 결과가 나오자 껴안고 축하해줬다”며 “슬프고 실망하는 와중에도 ‘당신들이 이겼으니 우리도 이긴 거예요’라고 말해주는 소녀의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고 했다.



슈테른 이사는 “앞으로 (재판 결과에 따라)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계획의 속도를 높이는지 의회와 함께 감시할 예정”이라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계속 싸우도록 서로를 지탱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봉비 기자 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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