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
필자는 호흡기내과학을 전공하고 평생 의대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환자를 돌봐온 의사다. 일하면서 담배가 폐암, 후두암, 구강암 등 수많은 질환의 원인이란 것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더 이상 논의가 불필요할 만큼 과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4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고 했을 때 흡연의 폐해를 곧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소송은 10년째 현재진행형이다.
담배회사는 담배의 중독성이 다른 물질보다 약하고 담배 첨가물은 안전성이 검증돼 담배가 암 발생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2020년 11월 법원은 흡연과 암의 인과관계, 담배회사의 불법행위 등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공단이 항소해 현재 2심이 진행 중이다.
법원이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준 게 처음은 아니다. 공단이 소송을 내기 전 개인들이 먼저 소송을 냈고, 담배제조·판매·수입에 관한 법률인 ‘담배사업법’이 헌법상 보건권,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한다는 헌법소원도 제기됐다. 흡연과 폐암 및 후두암의 인과관계가 일부 인정됐으나 개인소송은 모두 패소했고 담배사업법은 합헌으로 결정됐다.
그럼에도 공단이 소송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소송을 통해 국민들의 보험료로 운영되는 건강보험 재정을 보전하고 담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공식적으로 확인받는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공단이 지출하는 흡연 관련 진료비는 2022년 약 3조5000억 원으로 소송 제기 당시의 2배 이상이 된 것으로 추산된다. 진료비 외에도 금연지원 사업에 연간 300억 원 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장기 흡연자의 폐암 조기 진단을 위해 2023년 30만 명에게 검진도 실시했다.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20∼30년 누적돼 나타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걱정은 더 커진다. 직접흡연으로 사망하는 인구는 2019년 약 5만8000명, 하루 159명으로 추산된다. 한국 남성 흡연율(2021년 기준 26.3%)은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9.9%)보다 높다.
다행히 최근 10년 동안 담배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다. 2015년에 담뱃값이 인상됐고, 2016년부터 담뱃갑에 경고그림이 부착되는 등 규제가 확대됐다. 지난해 10월 ‘담배 유해성 관리에 관한 법률’이 10년 만에 국회를 통과해 담배 유해성분을 공개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법원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미국은 담배소송에서 승소한 다수의 사례가 있다. 특히 1999년 연방정부가 제기한 소송에서 담배회사가 흡연 폐해를 은닉하고 속여왔다는 사실을 밝혀 승소했다. 이 판결을 통해 담배회사가 담배의 위해성을 국민에게 알리고 흡연 폐해의 책임을 지게 됐다. 국민이 건강 피해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흡연율을 낮추는 계기도 됐다.
폐암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힘겨운 숨을 몰아쉴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질병이다. 소송에서 재판부가 담배와 폐암 간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증거, 전문가 의견, 국민 여론, 사회 변화 등을 전향적인 태도로 살펴봐 주길 요청하며 더 건강한 국민을 위한 재판부의 역사적 판결을 기대해 본다.
정기석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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