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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분열된 조국이 갈 길 밝혔던 민족자주의 등불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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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배다지 민족광장 상임의장 영전에



한겨레

고인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자주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사진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집회 참석 때 모습이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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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중 재학 때 단독정부 반대 투쟁
체포·고문당하며 ‘애국의 길’ 눈떠
부산대 들어가 ‘이종률 문하생’ 되고
오로지 민족자주 통일운동 한길로
민자통 활동으로 5·16 뒤 수배생활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3년 옥고





늘 자신 낮추어 ‘실천종사자’라며
민족자주 평화통일 위한 치열한 삶





‘민족자주 단호쟁취!’



지난 4월13일 오후 별세하신 청간(靑幹) 배다지 선생님의 육필 유언입니다. 선생님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자주·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실천해 오신 분입니다. 올해 구순을 맞이하셨던 선생님은 오로지 자주통일 운동의 한길을 걸었던 민족자주의 등불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34년 부산 기장군 장안면 월내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1948년 동래중 시절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위한 동맹휴학 투쟁과 유인물 살포를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하면서, 일찍이 소년 시절부터 애국애족의 길에 눈을 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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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다지 민족광장 상임의장. 필자 제공


1954년 부산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뒤 산수 이종률(1905~1989) 교수의 문하생이 됩니다. 일생을 오로지 민족자주 운동의 한길로 걸어가게 된 결정적 출발점이었습니다. 이종률 교수는 일제강점기 때 6·10만세 운동과 신간회 운동,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 등 항일독립운동으로 여러 번 투옥되었습니다. 일제 패망 뒤 조선학술원 활동을 했고 민족건양회를 창립했으며, 민족혁명론을 정립한 분입니다.



선생님은 평생의 스승인 이종률 교수의 민족혁명론 노선 철학과 정치학 공부를 바탕으로 운명하는 순간까지 분열된 조국사의 질곡을 바로 세우기 위한 자주통일 민족운동에 종사하셨습니다. 대학 시절 이종률 교수의 문하생 김상찬, 하상연, 이영석, 조현종 등과 민족자주 학술단체인 민족문화협회에 가입하여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대학 4학년 때 ‘국제신문’ 기자가 됐습니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이종률 교수가 이끈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민민청 경남도맹 간사장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셨지요. 민민청은 1961년 2월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5·16쿠데타로 민민청과 민자통이 해체되고 선생님은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다가 1962년 3월 수배가 해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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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육필 유언.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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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추모식에서 송기인 신부가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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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추모식에서 박지원 전 국정원장이 추모사를 낭독하고 있다.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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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1964년 옛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입사하여 다시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68년 9월 통일혁명당 사건 사형수 김질락에게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선생님은 2022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자신은 ‘스승 이종률 교수에게 배운 우리 민족의 진로는 민족혁명 노선이라는 확고한 철학적 관점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활동하며 살아왔다’고 강조하며,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한 재심청구를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부산연합 상임의장 시절 국가보안법, 집시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6개월간 복역하였습니다. 1991년부터 민주주의민족통일 부산연합 상임의장을 지낸 선생님은 1995년 ‘부산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대책위’ 상임대표를 맡아 1999년까지 미군 하야리아 부대 기지 반환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셨습니다. 1997년에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을, 2001년 6월부터 2년간 부산교통공단 상임감사를, 2005년부터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내셨습니다. 2010년 6월 민족광장을 설립해 상임의장으로 취임한 그해 김대중부산기념사업회를 창립한 후 지난해까지 이사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늘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실천종사자’라고 겸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 선생님은 오로지 분열된 조국사를 민족자주·평화통일의 역사로 전진시키기 위한 민족혁명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한 혁명가적 삶을 살아오셨지요. 선생님의 혁명운동은 민족자주, 외세영어(外勢領御, 민족자주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외세와 외교하기), 동경(同慶)통일(남·북에 함께 경사가 되는 통일)론을 기초로 한 자주평화통일운동의 한 길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평소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의 역사적 조건 아래에서는 민족 자주에 기초하지 않은 담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는 역사학도인 저에게 오늘날 한국 대학의 정치학과 역사학이 민족론에 기초한 과학론이 부재하다는 현실을 늘 걱정하셨습니다. 한미동맹은 민족자주에 기초한 상호 우호적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민족사인(民族史人)이셨습니다. 이미 먼저 가신 존경하는 스승 산수 이종률 교수와 동지였던 그 제자 분들 모두 민족혁명과 인간혁명을 실천하였던 민족사인의 삶이었듯이, 선생님의 일생도 바로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분열된 조국사가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밝혀 주셨던 민족자주의 등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제 선생님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분단조국의 역사적 과제는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앞으로 누구의 지도를 받아야 할지, 선생님 빈자리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집니다. 불민한 저희 후학들에게 늘 큰형님 같았던 청간 배다지 선생님, 90년 성상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가시옵소서. 불초 후배들이 선생님이 남기신 과제를 짊어지도록 하겠습니다. 삼가 두 손 모아 명복을 빕니다.



장동표/부산대 명예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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