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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朝鮮칼럼] ‘의대 블랙홀’ 벗어나 진짜 블랙홀 탐구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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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의대 광풍은 ‘피크 코리아’ 적신호 아닌가

성공의 절정에서 허망하게 추락하면 안 돼

선진화 지속되려면 진리 탐구의 정신 회복해야

조선일보

사건 지평선 망원경(EHT) 국제공동연구진이 2019년 4월 10일 공개한 처녀자리 은하 중심에 있는 M87 블랙홀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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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의대 블랙홀”이 이공대를 위협한다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계획을 발표하자 “의대 반수(半修) 열풍”이 불어 대학가가 썰렁하다고 한다. 명문대 공대에 입학한 장학생이 적만 걸고 재수 학원으로 직행하는 부조리한 현실이 뉴노멀(New Normal)이 된 듯하다. 서울 주요 대학 10곳의 신입생 중도 탈락률이 10%에 이른다. 미래를 위해 분투하는 청년들에겐 격려를 보내지만, 사회적으로 그 총명한 두뇌들이 창의적인 사유와 자유로운 상상에 활용되지 못함은 안타깝다. 대학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어떤 사회도 진리 탐구와 비판적 반성 없이는 지속적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

“의대 블랙홀”은 “피크 코리아(peak korea)”의 적신호가 아닌가? 대한민국이 혹시나 성공의 절정에서 허망하게 추락하진 않을까? 기우이길 바라지만 그런 염려를 놓을 수 없다. 지금도 세계의 유수 대학에선 천체물리학자들이 수백만 달러의 연구 기금을 활용하며 “의대 블랙홀”의 방해 없이 진짜 블랙홀을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인류는 최초로 5500만광년 떨어진 M-87 은하의 블랙홀을 촬영했다. 지구의 4대륙에 설치된 천체망원경 여덟 대에 잡힌 조각조각의 이미지들을 정교하게 합성하는 방식이었다. 블랙홀은 극도로 밀도가 높은 거대한 질량 덩어리로 중력이 너무나 강력하여 빛까지 모조리 빨아들이는 시공간의 영역을 이른다. 지구만큼 큰 행성을 호두알보다도 작게 압축하면 블랙홀이 된다. 그런 블랙홀이 카메라에 잡힐 리 없지만 그 속에 빨려 드는 입자들은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사라진다. 과학자들은 그 현상을 ‘사건 지평(event horizon)’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관측된 블랙홀 주변은 도넛 모양의 흐릿한 불빛 형상이다. 이제 연구자들은 오색 실타래처럼 선명한 이미지를 포착하기 위해서 지구 밖에 특수 망원경을 설치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같은 대학의 한 동료 물리학자에게 블랙홀 연구의 목적과 효용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3차원의 공간이 아니라 실은 2차원적 평면의 발현일 수도 있다고 했다. 현대 물리학의 이른바 홀로그래피 원칙(holographic principle)이다. 일신의 영달과 단기적 이윤만을 좇는 사람들에게 블랙홀 연구자들은 하늘의 별을 보다 우물에 빠졌다는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처럼 우스꽝스럽겠지만, 물신의 유혹에서 벗어나 근대 문명의 발흥을 되짚어 보면 누구나 그 밑바닥에 도도히 흐르는 진실 탐구의 정신과 비판적 합리성을 볼 수 있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모인 중국 청년들은 “싸이(賽·science·과학) 선생”과 “더(德·democracy·민주) 선생”을 부르짖고 있었다. 중화주의에 빠져 있던 중국 지식인들이 근대 문명의 거대한 정신적 뿌리를 직시한 순간이었다. 근대 문명을 일으킨 양대 동력은 과학기술과 입헌 민주주의였다. 유교 문명도 격물(格物)·궁리(窮理)의 정신과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이상을 강조했지만, 성리학적 격물은 과학적 탐구로 이어지지 못했고, 유교적 민본 사상은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않았다. 격물·궁리의 정신은 동아시아의 철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같은 서양 과학자들이 발현했고, 치국·평천하의 이상은 로크, 홉스, 칸트, 밀 등의 근대 사상가들이 추구했다.

지금까지 한국은 후발 주자로서 서양의 자연과학과 자유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창의적으로 응용해 왔다. 그 결과 세계사에 빛나는 발전의 신화를 써올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성공 가도를 달려갈 수 있을까? 미래를 낙관하기엔 한국 사회의 지적 편향과 문화적 획일성이 심각하게 지나쳐 보인다. 어느 사회든 과도한 몰림, 일방적 쏠림은 총체적 위기의 징표다. 집단 지성이 균형 감각과 조절 능력을 잃으면 문명의 기획은 물거품이 된다.

지난 반세기 한국인들은 우수한 기술력으로 최첨단의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여 인류 공영에 이바지해 왔으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다양한 전문가 집단의 진리 탐구와 비판적 반성 없이 선진화는 지속될 수 없다. “의대 블랙홀”을 벗어나 진짜 블랙홀을 연구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와 원대한 이상을 되찾을 때다. 그래야만 피크를 뚫고 새로운 정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인류 문명사는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우주의 신비를 풀려 하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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