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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윤복희와 대상 타고 오열했던 서울가요제 음반… ‘여러분’은 영원한 위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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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48] 가수 윤항기

1979년 MBC 서울국제가요제 실황 음반 초판본 표지에는 가수 윤항기·윤복희 남매가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사진이 담겨 있다. 윤복희가 작사하고 윤항기가 작곡한 노래 ‘여러분’이 대상을 타며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순간.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서 최근 만난 윤항기(82)는 “대상 호명 순간, 아무 기반도 없이 우리 남매가 스스로 생존해왔던 모든 순간이 복받치듯 떠올랐다”고 회상했다.

“곡 발표 전후 나는 폐결핵 말기 선고를 받았고, 동생도 말 못할 개인적인 아픔을 겪고 있었어요.”

1974년 시작된 ‘한국가요제’를 전신으로 삼아 1977년 개최된 ‘서울가요제’는 이듬해 국내 최초의 국제가요제인 ‘서울국제가요제’로 변신했다. 윤항기는 “다국적 가수가 모이는 무대라 영어 가사가 필수였고, 어렵고 수준 높은 곡이 수상작으로 많이 나와 작곡가들에겐 최고 영예였지만, 대중적 흥행을 폭발적으로 누리진 못한 대회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여러분’은 계속 인기를 누렸다. 2011년 음악 경연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가수 임재범의 커버곡 등 많은 후배 가수들이 다시 불렀다. “우리 남매 스스로에게 하고 싶던 위로의 말이 이토록 오래 대중을 향한 위로곡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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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항기·윤복희 남매가 1979년 곡 ‘여러분’으로 서울국제가요제 대상을 타자 오열하는 모습. 실황 음반 초판 표지에 실렸다. 오른쪽 사진은 장충 녹음실 음반 기록지. 키보이스가 국내 최초로 록 음반을 낸 사실을 증명한다. /남강호 기자·윤항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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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8군으로 향한 예술인 DNA

윤항기는 “우리 남매의 어린 시절은 늘 예술로 가득했다”고 했다. 부친 윤부길은 경성음악전문학교(서울대 음대의 전신) 출신으로 ‘견우와 직녀’ 등을 연출한 국내 1세대 극작가이자 뮤지컬 배우. 모친도 무용가이자 국악인이었다. 두 사람은 6·25전쟁 직후 유랑극단 ‘부길부길쑈’를 이끌었고, 어린 남매를 데리고 전국 곳곳을 순회했다. 윤복희가 6세 때 국내 최연소 어린이 가수 출연 기록을 세운 것도 아버지가 연출한 ‘크리스마스 선물’ 무대에서였다. “이난영 선생의 남편이자 김시스터즈의 아버지로 유명한 김해송 선생과 저희 아버지가 쌍봉을 이루는 1세대 악극단장들이었죠. 어릴 때부터 노래와 춤 귀동냥이 일상이었어요. 제 아들은 CCM 가수를 거쳐 작곡가로, 손자는 피아노를 전공 중입니다. 동생은 제게 ‘오빠, 우린 DNA를 타고났나 봐’ 자주 이야기했죠.”

하지만 남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윤항기가 10세, 윤복희가 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5년 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며 어려움이 찾아왔다. “어릴 적부터 가수 생활을 한 동생은 미8군 무대로 향하며 친척과 부모님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나는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다”고 했다. “청계천 인근 피란민들 밀집 지역에서 넝마주이들하고 박스를 주워 덮고 지내다가 인근 교회를 통해 고아원으로 옮겨졌죠. 약 3년 후 경기도 오산의 외삼촌 댁에 겨우 연락이 닿으면서 복희와도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동생은 열세 살 나이에 이미 대형 미8군 무대인 ‘에이원쇼’ 전속 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동생이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걸 보면 빛이 번쩍번쩍 나는 것만 같았다”고 했다. 윤항기는 이때 ‘음악으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나도 동생처럼 음악을 했으면 덜 고생했을 텐데 싶었죠.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무대에 올려달라 졸랐지만 ‘남자는 공부를 해야 해’라며 반대에 부딪히는 바람에….” 윤항기는 “그길로 악단장이자 작곡가였던 김희갑 선생님을 찾아가 연구생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처음엔 미8군 클럽에서 본 공연 끝나고 춤출 때 불러주는 보너스 무대 가수로 일하다가 1959년 크리스마스 날 우연히 선배 가수 땜빵으로 노래하며 데뷔했다. “윤복희가 없었으면 지금의 윤항기도 없었던 거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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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윤복희의 오빠이자 1960년대 미8군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키보이스 원년멤버 가수 윤항기씨가 8일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은 윤항기씨가 작곡한 곡 ‘여러분’으로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수상했을때 음반, 키보이스 활동 당시 사진과 초판 음반(국내 최초의 록음반). /남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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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의 록 음반 ‘키보이스’

그렇게 시작된 미8군 생활은 1963년 7월 ‘키보이스(차중락·차도균·김홍탁·옥성빈·윤항기)’의 국내 최초 록 음반 ‘그녀 입술은 달콤해’ 데뷔로 이어졌다. 윤항기는 “카네기, 드 씨네, 세시봉 등 명동과 종로 일대 음악감상실에서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 이야기를 하던 해병대 출신 친구들 모임이 키보이스의 출발점이었다”고 했다. “당시 미8군 출신들은 해병대 연예병, 군악대를 많이 갔죠. 저는 군악대, 차도균과 김홍탁은 연예병 출신이고, 차중락은 차도균의 사촌으로 불려왔고요. 브루벨즈, 봉봉, 아리랑 브라더스 등 중창단은 있는데 록 그룹은 없으니 한번 해보자 했죠.” 부족한 주머니 사정에 “악기를 마련하는 것부터가 큰일이었다”고 했다. “당시 국내에는 베이스 기타가 없어 콘트라베이스를 쓸 때였는데, 차도균은 사촌 여동생 첼로를 뺏어왔죠, 전 세숫대야 받침대에 밴조(컨트리 장르에 자주 쓰이는 민속 기타)를 잘라 걸쳐 놓고 드럼 대신 두드리기 시작했고요.”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시작한 활동은 1962년 데뷔한 비틀스의 세계적 인기와 맞물려 호평을 받았다. 번안곡 위주로 담긴 데뷔 앨범 표지에는 ‘한국의 비틀스’란 수식어가 국내 처음으로 붙었다. “본래는 데뷔 직전 내한했던 ‘선스팟’이란 필리핀 캄보 밴드를 모델로 했어요. 데뷔 앨범 사진이 전혀 비틀스 차림이 아닌 이유죠. 음반사가 발 빠르게 수식어를 붙인 거였는데, 이후에는 우리가 진짜 비틀스 패션을 국내에 유행시켰어요. 부츠에 장발, 아니면 영국식 정장 차림.”

한편에선 신중현의 ‘ADD4′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고, 1964년 12월 국내 최초의 창작 록 음반을 발표했다. 국내 최초의 녹음실로 알려진 ‘장충녹음실’에 남아 있던 키보이스의 녹음 기록지 한 장이 ‘국내 최초 록 음반 데뷔’ 기록을 갈랐다. “신중현씨도 녹음 준비한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듣긴 했었죠. 당시 이화여고, 풍문여고 등 서울 여고생들이 집결하던 음악감상실, 그리고 주요 축제 무대 공연 등은 키보이스와 ADD4가 1순위 섭외 대상이었어요. 그런 대단한 인물과 함께 경쟁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뿌듯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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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가요제 대상 트로피. /남강호 기자


이후 윤항기는 1974년 솔로로 전향했고, ‘별이 빛나는 밤에’ ‘장미빛 스카프’ ‘나는 행복합니다’ 등의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했다. “그룹으로는 생계 유지가 어려운 현실적 문제와 번안곡이 아닌 내 창작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1986년 돌연 가수 생활을 중단했고, 30년간 목사로 활동 후 2014년에야 다시 가수로 돌아왔다. “1968년 약 2년간 월남 위문 공연에서 폐결핵을 얻었고, 이후 1970년 후반까지 투병 생활을 했죠. ‘여러분’ ‘별이 빛나는 밤에’ 등 전성기 곡 대부분이 투병하며 쓴 거고요. 살려만 주신다면 좋은 일에 헌신하겠다고 간절히 기도를 했어요.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다시 돌아온 가수 생활에서 남은 목표는 “한국 그룹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키보이스 원년 멤버 출신인 가수 김홍탁과 함께 “케이팝 메모리얼 센터를 남은 여생 동안 만들어보는 게 목표”라고 했다. 올해는 “가수 데뷔 65주년이자 키보이스 데뷔 60주년을 맞아 연말쯤 후배 가수 최백호와 함께 협업곡을 내고, 키보이스 멤버들과 기념 공연도 열 계획”이라고 했다. “1세대 미8군 출신 가수들, 그리고 그룹사운드들이 지금의 한류의 기초가 될 만한 시작점을 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기록을 힘 닿는 데까지 남겨보고 싶습니다.”

[윤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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