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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수학영재들의 아버지’ 송용진 교수 “아무리 똑똑해도 8세에 대학 보내는 것은 잘못”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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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한국대표단 지도

“학업적으로 성공한 영재 대부분 예의 바르고 겸손

영재성 개발한다고 서두르고 드라이브 걸면 실패

영재교육 확대가 과도한 사교육, 학습 부담 부추겨

국가에 기여할 소수 인재에만 병역 혜택 주기를

허준이 교수도 군대 갔다면 필즈상 받기 힘들 것”

“아무리 뛰어난 영재라 해도 8세를 대학에 보내고 10세를 과학고에 진학시키는 것은 지극히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머리가 좋다면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으니 다양한 소양과 관심, 사회성을 길러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됩니다.”

올해로 30년째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 한국대표단을 이끌어 온 송용진(66) 전 인하대 수학과 교수는 “영재성을 개발하겠다고 드라이브를 걸수록 (아이는) 망가지기 쉽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일보

송용진 전 인하대 교수는 15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영재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고작 10세에 승부보려 하지 말라”면서 “20대 중반을 목표로 긴 호흡을 갖고 다양한 소양과 사회성을 길러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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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한국대표로 뽑히는 6명을 비롯한 최종후보 15명, 여름·겨울 영재캠프 참가생 60∼70명 등 30여년간 송 교수가 만난 영재는 수백명에 이른다. 누구보다 한국의 수학영재들을 많이 그리고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지난해 정년퇴임한 그는 최근 책 ‘영재의 법칙’(교보문고)을 내고, 112개국이 참가하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의 선출직 이사회 멤버로 활동하는 등 저자이자 수학자로서 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 15일 서울 용산구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난 송 교수는 “영재교육 확대가 초·중학생의 과다한 사교육 및 학습 부담을 늘리는 원인이 되고 있다”면서 “영재고·과학고는 축소하되, 인재 양성 차원에서 국가 발전이나 국위 선양에 도움되는 극소수의 영재에 한해 다른 분야처럼 군 면제 혜택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송 교수에게 영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해와 편견, 그리고 한국 영재교육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영재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1992년 서울대 은사님 권유로 한국수학올림피아드(KMO) 계절학기 강의를 하며 인연이 됐다. 1995년부터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한국대표단 부단장을 맡아 학생들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매년 한국올림피아드만 3회 개최하고 여름·겨울학교와 봄·가을 통신강좌, 대표학생 집중교육 등 교수라는 본업에 지장을 받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다 보니 올림피아드 이사들 대부분이 몇 년 일하고는 그만두고 싶어한다. 저도 수학자로서 연구시간이 부족해 아쉽지만, 책임감 때문에 지금까지 온 것 같다.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아한다.”

—30년간 수많은 영재들을 만나셨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처음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한국대표단 부단장을 맡았을 때 다른 교수님이 ‘(영재)학생들이 말을 안 듣고 자기중심적’이라고 하셨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대부분 예의바르고 겸손했다. 계속 관찰해 보니 겸손한 태도와 마음가짐이 그들의 끈기과 정신력, 승부욕을 잘 가꾸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자기중심적이면 실패하거나 남들에게 뒤처졌을 때 실망감이 크고 ‘쟤는 저래서 잘해’, ‘난 원래 수학을 좋아지 않았어’ 등의 핑계를 찾기 쉽다.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학습동기는 건전한 승부욕이다. 잘하는 친구를 존중하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돌아보는 아이가 발전한다.”

—영재 부모들의 공통점도 있나.

“보통 5, 6세 때 영재성이 보이면 과도한 선행을 하며 드라이브를 거는데, 대부분 실패한다. 학업적으로 성공한 영재의 부모들은 조급해하지 않고 침착하게 아이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올림피아드 한국대표의 부모님 90%가 회사원이었다. 유명한 교수, 의사 부부도 있고 부모 학력이 좋을수록 자녀가 잘할 확률이 높은 것도 사실이지만, DNA보다는 학습태도와 환경, 분위기 영향이 크다고 본다. 상위 0.1%끼리 모였을 때 재능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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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주목받고 화제가 됐다가 사라지는 영재들이 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국민들의 기대는 영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미디어에 많이 나왔던 이른바 ‘국민신동’에 대해 ‘너무 똑똑하니 주변에서 시기해서 영재성이 발휘가 안 된다. 미국이나 해외로 보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영재교육하기 가장 좋은 나라는 우리나라다. 아무리 뛰어난 영재라 해도 8세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 10세를 과학고에 보내는 것은 지극히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지능에 맞는 (선행)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머리가 좋다면 언제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 나이에 맞는 사회성, 운동, 다양한 소양을 길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어떤 점이 미국보다 영재를 교육하기 좋은가.

“미국은 주(州)정부마다 영재교육 시스템이 다르고 대부분 사립학교에서 운영해 인구 대비 혜택받는 학생이 적다. 우리나라는 1만7000개의 다양한 영재교육원, 총 28개의 과고·영재고 등 영재교육기관이 초·중등부로 나뉘어 체계화돼 있다. 또 미국은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 우선이고, 한국은 공부 잘하면 다 용서가 되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우대받는 분위기다.”

—영재의 성공과 실패는 어디서 갈리는가.

“영재에 대한 사회의 단기적 목표는 학업 성취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진짜 성공은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춘 훌륭한 성인이 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영재의 학업적 성취는 중·고등학교 때 결정되지만, 성공한 지식인이나 전문가가 될지는 20대 후반, 30대 초반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렸다. 박사학위를 받고 좋은 직업을 얻고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회성이나 스트레스 조절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나라는 사교육 중에서도 수학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그렇다. 수학은 지적 능력의 표본으로 변별력이 높을 뿐 아니라 이해력과 사고력을 키우고 학업능력과 학습태도를 길러준다. 즉 수학으로 학생들의 지적 능력과 학습태도 모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학들이 수학을 많이 보는 것이다. 결국 입시에서 비롯된 결과다.”

—영재교육 역시 수학, 과학에 쏠려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초·중학교 때는 영재교육원에 미술, 정보 등 다양한 과목이 있지만 고등학교부터 과학, 수학에 국한돼 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흔히 하는 오해 중 하나는 과학, 수학, 인문 등 분야별로 영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예체능 영재를 제외하고는 구분할 필요가 없다. 미국에서도 영재를 분야별로 구별하지 않고 학문적으로도 지능이 뛰어나면 언어, 수학, 과학 모두에서 비슷한 재능을 보인다는 게 일반적이다. ”

—책에서 영재고·과학고 축소를 주장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영재교육은 확대일로다. 국회의원들이 선거를 위해 늘려놨다. 엘리트교육보다 평준화가 영재교육에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 놓으면 학업 분위기와 경쟁 때문에 더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재능이 있어도 쉽게 꺾이는 부작용이 있다. 영재고까지 간 아이들은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조금만 못해도 스스로 루저라고 생각하거나 남에게 지는 것을 견디지 못해 학업 의지가 떨어지고 빨리 포기하는 것을 많이 봤다. 초등학교 때부터 부모가 과하게 몰아붙여서 번아웃이 오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으로는 엘리트교육 지향이 우리나라를 교육지옥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초3 때부터 달려야 특목고, 좋은 대학 갈 수 있다는 생각에 10세 전후 아이들이 지나친 학업 부담에 시달린다. 영재였던 딸을 외고에 보내보니 공부를 너무 많이 시켜서 아들은 일반고에 보냈고 잘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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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 내에서 수학교육의 문제점이나 한계가 있다면.

“교과서는 얇아지고 다루지 말라는 조항은 너무 많다 보니 필요한 개념들이 숭숭 빠져 있다. 그러니 학교 수업만으로는 수능(수학)을 잘 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 학원에서 뻔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배운 아이들이 유리한 구조가 됐다. 수학은 세계적으로 표준화돼 있어 괜찮은 이공계 대학에 가려면 미적분학은 배워야 하는데 (필수 교육과정에) 빠져 있다. 수능에서 심화수학을 빼면 대학이 내신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하는데 대학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대학 가서 배우면 된다고도 하는데 수학은 치열하게 공부하던 고등학교 때 배우지 않으면 대학 와서는 안 하려고 한다.”

—병역의무가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Fields Medal) 수상에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하셨다.

“국내 음악 콩쿠르 수상자와 기능올림피아드 메달리스트 등 모두 군 면제를 받는다. 반면 수학·과학 올림피아드는 총 8개인데 혜택이 없다. 필즈 메달은 4년에 한 번, 40세 미만에게 수여하는데 한국 최초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도 군대를 갔다 왔다면 나이 제한 때문에 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1년에 두세 명만 병역 혜택을 주자는 것이다. 영재들이 좋은 대학 가는 것 자체가 혜택이라는 시각 때문에 반대하는데, 국가 발전이나 국위 선양에 기여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생각으로 케이팝이든, 예술이든, 수학이든 분야를 가리지 말고 관련 위원회를 만들어 객관적 업적 근거를 토대로 공정하게 선발해 병역 혜택을 줬으면 한다.”

—우리나라의 수학 실력은 세계적으로 어떤 수준인가.

“만 15세 학생(고1)들 대상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에서 한국은 일본, 싱가포르, 대만 등과 함께 거의 1등을 한다. 다만 수학자들의 수준은 미국, 영국, 일본, 러시아와 격차가 꽤 있다. 우리나라에서 필즈 메달 수상자가 나온 것은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수학에 있어 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한 나라다. 세계수학자연맹은 가장 낮은 1군부터 5군까지 국가를 분류하는데,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2군에 머물다가 2012년 한 번에 두 계단을 올라간 최초의 국가다. 얼마 전 가장 높은 5군에 올라왔는데 2군에서 5군으로 진입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5군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 있다.”

—평생을 수학과 영재교육에 힘쓰고 살았는데 앞으로 계획은.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선출직 임원 임기가 2년반 남아 있고, 아프리카 올림피아드의 운영을 도우며 한국대표단 부단장도 여전히 하고 있다. 최근 10년 이상 연구하던 ‘가장 일반적인 해러의 추측’이라는 문제를 풀어 수학자로서 굉장히 영광스럽다. 최근 몇 년간 ‘수학은 우주로 흐른다’, ‘수학자가 들려주는 진짜 논리이야기’, 영재의 법’ 등을 출간했는데 이런 집필 활동을 계속 해나갈 계획이다.”

송용진 교수는...●1958년 서울 출생 ●용문고·서울대 졸업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박사(위상수학) ●인하대 수학과 교수 ●국제수학올림피아드 한국대표단 단장·부단장(26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선출직 집행위원 ●서울시 문화상 ●대한수학회 논문상 ●과학기술훈장 혁신장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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