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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동인문학상] 4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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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5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최근 월례 독회를 열고 작년 하반기부터 올해 초 출간된 소설 작품을 검토했습니다. 4월 독회 추천작은 김나현 소설집 ‘래빗 인 더 홀’(자음과모음)과 문지혁 소설집 ‘고잉 홈’(문학과지성사)입니다.

조선일보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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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문학과지성사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정명교 문학평론가


♦래빗 인 더 홀

김나현의 ‘래빗 인 더 홀’(자음과 모음)은 얼핏 보면 동화 같은 소설인데 자세히 읽으면 오늘날 서민들의 삶을 적절히 반영하는 ‘리얼한’ 이야기들을 기본 제재로 두고 있다. 이런 두 겹의 스크린을 겹쳐 놓는 까닭은, 현실에서의 일들이 이해가 불가능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인물들의 삶을 곤란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곤란함 이전엔 현실에 대한 무너진 환상, 즉 환멸들이 있다. 풀이하면 이렇다.

현실은 현실 스스로를 규정하는 각종의 프레임을 양산해 왔으며 사람들은 그 프레임에 맞추어 세계를 해석하는 데 아주 익숙해 있다. 그 프레임이란 이를테면 미적 취향이나 미각, 동물을 바라보는 눈, 남녀·노소·흑백·지역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 등등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데, 그것들은 세상에 넘쳐나는 각종 매체를 타고 급격히 균질화된다. 그래서 반려동물을 귀엽고 사람의 외모를 판별하는 기준이 획일화되고, 유명 셰프가 요리한 음식만이 맛있으며, 약간의 계산을 하면 집을 살 수 있고, 집 장만을 위해서는 당분간 아이는 가지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이 뿌리내리게 된다.

문제는 그런 프레임이 대량으로 제공되는데도 현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는 것. 상사의 권유에 따라 초대권을 사용했더니 고발을 당해서 성공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된다. 심지어 그 프레임이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노숙자에게 애써 음식을 제공했더니, 음식이 맛없다는 불평을 듣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며 사과를 요구당하기도 한다.

더 큰 혼란은 이런 혼란스런 세상에서 어김없이 성공하는 사람들은 출현하여 그의 출세를 과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매번 방향을 알 수 없는 추처럼 움직이는 현실의 돌주먹에 얻어터진 서민들은 억울함 이전에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하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 혼란에서 벗어나려면 다른 기준점을 잡아 보는 게 당장 눈에 띄는 수단이다. 저 프레임들과는 다른 기준점을 말이다. 기준점의 설정은 대체로 두 방향으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그려놓고 거기에 준해서 현실을 평가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상적 상태가 정말 믿을만한 것인지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아주 다양한 방법적 도구들이 제출되지만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가장 심각한 사태는 그런 방법적 도구들도 갖추지 못한 채로 자신이 상정한 이상적 상태를 무조건적으로 맹종하는 경우인데, 현실은 그런 경우들로 넘쳐나서 해결책도 없이 ‘박 터지는’ 싸움이 매일 벌어진다. 무엇보다도 프레임이 소위 ‘과학’과 ‘진실’의 이름으로 인간들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짐승’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이는 프랑스의 교양지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3월 28일 자 특집 제목이다), 하는 회의가 시시때때로 고개를 드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향은 프레임 보유 이전의 순수의 상태로 회귀하여 그에 근거해 현실을 가늠하는 것이다. 흔히 동화가 그런 방법을 취하는데, 그러나 동화는 그 방식에 골몰하여 현실과의 접촉을 기도하지 않으며, 오로지 그 ‘순수’를 즐기면서 어린이들에게 생의 원기소를 주려고 한다. ‘래빗 인 더 홀’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그런 ‘순수 상태의 기준’을 현실의 상황에 겹쳐 놓음으로써 현실을 이해하는 가늠자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 입장에 서면, 현실의 이 혼란은 ‘더러움과 어둠’ 속에 점차로 빠져들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작품들에 빈번히 어딘가 망가진 상태, 더러워진 모습, 컴컴한 어둠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현실이 명료히 파악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순수 상태’라는 가정은 실제론 명백한 허구에 불과해서 현실에 개입하는 통로를 찾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난관을 벗어나기 위해, 현실로부터 퇴화한 상태로서 ‘순수’의 모습을 제시한다. 가령 눈이 멀거나, 매일 과제 설정이라는 유년기의 훈련 상태로 돌아가거나, 동물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런 방식은 이른바 ‘정상’과 ‘위용’을 자랑하는 현실로부터 배제되거나 박탈된 상태로 인물들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현실의 더러움을 폭로하는 데 유용한 효력을 가진다. 게다가 이는 현실을 규정하는 온갖 프레임들을 걷어내는 일종의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건 현실을 순수한 체험을 통해서 현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하는 효과도 발휘한다.

그러나 실제로 ‘순수한 체험’이란 없다. 어떤 체험들도 시시각각의 해석 틀과 그것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해석 틀의 수립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겪어지는 것이고 혹은 그런 과정을 생성하는 절차이다.

우리가 잘 아는 오이디푸스의 실명은 인간 사회의 시작이지 종말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들이 가정하는 순수 상태가 그 자체로서 독특한 소설적 면모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의 한복판에서 ‘더럽혀지는’ 양상으로 재형성될 때 현실과의 박진한 대결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권유도 덧붙인다. 실로 현실의 가장 참된 기준점은 현실 그 자체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실에 어둠의 장막처럼 드리워진 프레임들의 그물망 속에 외양적으로 통합되어 보이는 듯하면서도 그 그물망을 찢어버릴 수 있는 가시의 씨앗을 거기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고잉 홈

문지혁의 ‘고잉 홈’(문학과지성사)은 두 가지 특징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하나는 대부분의 인물이 미국 이민자, 혹은 미국 여행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 인물들은 정착한 이주민이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이동 중인 상태에 있기 일쑤이다. 그래서 그들은 캐리어를 끌고 있고, 버스 매표소 혹은 공항 근처에서 서성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서술이 아주 매끄럽다는 것이다. 서술의 중심을 차지하는 인물의 심리는 풍경과 인상 사이의 날렵한 대응관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여기에는 집요한 추구나 복잡한 사색은 없다. 대신 세상이 눈앞에 낯선 풍경처럼 펼쳐지고 그에 대한 주 인물(화자)의 때마다의 느낌이 토로 되며 지나간다.

주 인물의 물리적 위치는 바깥에서 이동하는 중에 있으나, 그의 마음은 실내에서 유리창 바깥의 스쳐 지나가는 물상들을 지켜보는 형국이다. 왜 이런 야릇한 어긋남이? 이는 여행 소설인가? 이민자 소설인가? 마치 문명판 ‘디아스포라’의 양 축을 동시에 겹쳐 놓은 듯한 이런 모양은 무슨 의미를 품고 있는가?

사실 이런 엽기적인 배치에는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이 숨어 있다. 전쟁 이후 한국인의 삶에서 미국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친 나라는 없을 것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이민을 가고 유학을 갔으며 어떻게든 미국에 정착하려고 애를 썼다. 강대국의 위력에 환멸을 느껴 비판적인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미국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자식을 미국 시민으로 만드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오려고 애썼다. 첫 번째 작품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의 ‘미스터 호철 리’처럼. 성공한 사람일수록 고향에 돌아와 말년을 보내고 싶다는 갈망에 집착했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한국에 돌아와 발휘하고 싶어한다. 그건 시방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러면서도 무슨 보증서처럼 미국과의 연을 놓치려 하지 않는다. 소설집 제목이 가리키듯이 그들은 끊임없이 ‘고잉 홈’하고 있다.

작가는 이런 상황이 아주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없이 되풀이되어 왔다고 관찰한다. 그런 관찰이 낳은 깨달음이 있다. 한국인은 미국에 살러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러 간 게 아니라, 무언가를 획득하러 갔다는 것이다. 자격증을 따고 박사 학위를 따고 돈을 벌러 갔다는 것이다. 공부를 해도 학문에 매진한 게 아니라 거기서 ‘증’을 따기 위해 공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인물은 ‘대학원’ 다닌 경험을 두고 무심코 “학원 다닐 때”(p.99)라고 회상한다.

그러니까 한국인은 미국에 이주한 후에도 여전히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기어코 집에서 한국 음식을 해먹듯이. 그러니 그들이 거주하는 미국은 여전히 낯선 타자인 것이고, 무언가를 빼내어야 할 자원이기만 하다.

이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좀 더 정확하게 말해, 이런 이주민들의 태도는 고향 사랑인가? 아니면 자기에 대한 집념인가? 전자라면 그 고향은 무엇이고, 후자라면 그 자기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결코 스스로 자신의 본질이라고 간주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이런 태도의 집단적 움직임은 인류의 공진화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아닌가? 거기까지 탐구하지 않지만, 독자에게 그런 물음을 떠올리도록 끊임없이 유도한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삶에 아주 익숙해진다. 타성화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런 태도 자체가 불가사의다. 그래서 이 집단주의에 어쩔 수 없이 얽혀드는 순간, 그에게 닥치는 것은 공포의 광경들이다. 두 유형의 대비를 통해 작가가 노리는 게 독자의 궁금증이다.

남는 문제가 있다. 이런 태도가 이민자 2세에게는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들은 이주민으로서가 아니라 정착민으로서 살게 된다. 그들은 부모 세대와 같은 ‘한국적 자아’에 대한 집착을 가질 수 있을까? 요즘 미국 문화의 일각에서 도드라졌듯이 그 2세가 한국적인 것을 그려서 주목을 받는다면, 그들에게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 역시 인류의 공진화에 여하히 작용을 할 것인가? 작가는 이런 문제를 탐구하는 데 충분한 경험을 쌓은 듯하다. 더 밀고 나가길 바란다.

또 하나의 문제. 한국/미국을 둘러싼 이 기묘한 길항은 한국의 ‘서울/지방’이라는 구도에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짐작이다. 1960년대 이래 한국의 작가들은 서울/시골의 변증법에 끊임없이 청진기를 들이대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듯한 진단이 내려진 적은 없었던 듯하다. ‘고잉 홈’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구효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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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효서


♦고잉 홈

문지혁의 소설집 ‘고잉 홈’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소설들은 제목이 이채롭다. 한국어로만 된 제목은 한 편뿐이고 한국어와 외국어가 섞인 제목이 두 편, 나머지 여섯 편은 모두 표기만 한국어일 뿐 전적으로 외국어다.

아무래도 그 외국어를 미국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미국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화자 혹은 주인공은 아내와 함께 뉴욕에 공부하러 갔다. 공부를 마쳤는데 미국에 그냥 눌러 살아야 할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 결정하지 않은 것 같다. 실은 못한 것 같다. 사정을 보아하니 결정의 주체가 되기도 힘든 듯하다.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결정이기 때문이다. 돈은 없고 벌이도 변변치 않다. 돈 때문에 비겁하다 못해 참혹해지기도 한다(‘나이트호크스’). 미국에 있기가 쉽지 않은데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쉽지 않다. 위독한 장인(평생을 미국에서 고단하게 살다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는 인물) 때문에 딱 한 번 아내와 함께 한국에 가나 코로나로 인해 장인을 면회하지도 못하고 해외입국자 격리 기간이 끝난 다음 날 아내만 남기고 다시 곧장 미국으로 돌아온다. 형편이 이러하니 절로 이게 뭔가 싶어질 것 같다.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에 실린 이야기다. 그러나 이게 뭔가 싶어지는 국면은 거의 모든 단편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곳과 저곳을 오가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래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이야기들은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에서 화자가 한국도 미국도 아닌, 하늘도 땅도 아닌 비행기(air)에서 내가 아닌 처지를 역설적이게도 자전적 형식(biography)으로 써내는 사태와 닮아 있다.

Going Home을 한글로 ‘고잉 홈’이라고 쓰면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영어도 한국어도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다. 작품 제목은 물론이거니와 작가는 자주 소설의 지문이나 대화에서도 그와 같은 표기를 노출한다. “유 노 왓? 애플 이즈 갓.(’크리스마스 캐러셀’)” “메이비 히즈 사바스 이즈 낫 오버.(‘뜰 안의 볕’)” 같은 것들이다. 작중 인물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을 ‘그냥’ 살듯이(‘뷰잉’), 작가는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말을 그냥 적는다. 보란 듯이 그냥 적는다.

작가는 어쩌자고 미국에서의 짧은 삶을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표기를 끌어들이면서까지 이토록 반복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거기에 뭐가 있다고.

뭔가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은 엉뚱한 데서 생겼다. “나는 ‘조금’을 ‘쬐끔’이라고 쓰는 사람에게 약간의 편견이 있었지만(52쪽)”이라는 문장이 어째서 나로 하여금 그런 확신을 갖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문장을 보면 ‘그냥’ 이상한 신뢰가 생겨버리는 것 또한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위의 문장이 나오는 단편 ‘핑크 팰리스 러브’에서도 ‘나’는 집이 아닌 다른 곳 돈 세사르 호텔에서, 현재가 아닌 다른 시간인 과거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첫사랑을 만난다. ‘조금’과 ‘쬐끔’처럼, 이토록 항목당 각각 둘로 나뉘는 공간, 시간, 인간 사이의 좁고 깊은 틈에 주인공과 독자를 역시나 빠뜨려버린다. 어쩌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려고. 소설이란 그런 거니까. 그런 걸 갈등 혹은 난관이라 할 수 있겠고 진퇴양난이거나 아포리아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소설에는 얄궂게도 그런 미장셴이 요구되는 거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둘로 나뉜 범주 항목으로부터 공히 소속감을 박탈당한 사람의 고통과 소외를 부각시키는 효과를 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도 미국도 아니고, 땅도 하늘도 아닌 에어에 위치한 인물의 절박한 처지. 따라서 고통과 소외에서 벗어나려면 어느 한 범주 항목으로의 안착이 필요한데 그것을 일컫는 많은 말 중 하나가 성공일 것이다. 미국에 든든한 일자리가 생기거나 한국에 그러한 자리가 나거나.

그러나 달리 말하면 성공이란 이른바 타자의 평균적 욕망에 스스로를 귀속시키는 사회적 퍼포먼스여서, 이럴 경우에는 외려 개별적 주체가 유보 내지는 소외되어버린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역설인 만큼 이 소외는 전자의 소외와는 달리, 주체의 훼손되지 않은 고유성을 건져 지켜내는 탈존으로 이어지게 된다.

소설 속 존재들은 한국과 미국, 현재와 과거, 나와 너, 무엇보다 이 언어와 저 언어 사이에 외롭게 놓여 있다. 그 소외를 어떤 소외로 인식할 것이며 그리하여 어떤 ‘언어의 블록쌓기(’골드 브라스 세탁소’)’를 할 수 있을지, 어렵지만 소설은 반드시 필요한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승우·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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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승우(62)의 단편소설 ‘마음의 부력’이 제44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고잉 홈

묘사를 최소화하고 인상을 부각한다. 불필요한 디테일은 생략하고 꼭 필요한 장면에 집중한다. 서술의 보폭이 넓다. 에피소드가 이야기를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라, 에피소드가 곧 하나의 소설이 된다. 시간은 요란하지 않고 장소는 복잡하지 않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크리스마스 캐러셀’)이 드는 회전목마를 연상하게 된다. 인물은 AI 소설을 위한 프로젝트를 위해 택시를 타거나 장인의 죽음을 향해 비행기를 탄다. 결혼 1주년을 맞아 특별한 사연이 있는, 그리고 특별한 사연이 만들어질 호텔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문지혁의 소설들에 대한 이야기다.

문장은 짧고, 짧은데도(짧아선가?) 단호하지 않아 마음이 가고, 힘을 쫙 빼고 기교 없이 쓰는 것 같은데도(그래서 그런가?) 의미가 심장해서 묘하다. 일상의 한 장면을 뽑아낸 ‘생활’을 너무나 태연하게 소설로 만드는 솜씨가 제대로다. 삶은 생활을 이기지 못한다. 개연성은 경험을 넘을 수 없다. 정말 중요한 일은 ‘그냥’ 알게 된다. “이유가 없는 일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관계도 아닌 관계가 존재하는 것처럼요.”(‘뷰잉’) 이를테면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읽었을 때의 묘한 느낌과 비슷하다. 복잡하지 않은데 단순한 건 아니다. 어렵지 않은데 쉬운 것은 아니다.

화자는 불친절하지는 않지만, 큰 붓으로, 떠오르는 대로 쓱쓱 그리는 자신만만한 화가와 같다. 그래서 그런가, 인물이 독자들 앞으로 쑥 나온다. 생생한데 모호하다. 가령 레드삭스의 야구 경기를 반복 시청하며 트럼펫을 연주하는 무뚝뚝한 세탁소 주인(‘골드 브라스 세탁소’)이 그렇고, 호의와 친절을 베풀지만 파악되지 않는 존재로 남은 인물 맹 선생님(‘뷰잉’)도 그렇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신비감을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유지한다.

문지혁의 소설 속 인물들은 미국으로 유학 온 한국 유학생들과 그들의 눈에 비친 교민들이다. 이들은 타국에서 생활의 곤란을 겪고, 적응하지 못하며, 혹은 포기한 채 적응하고, 혼란스러워하고, ‘가로세로 반듯한 길에서조차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골드 브라스 세탁소’)들이다. 이들은 ‘미국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시공간’(‘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에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들의 상황에 연결된 귀가 본능은 아마 불가피했겠으나 적절하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한국인들은 미국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미국에서 한 30년 이상 살다 보면 한국에 가고 싶어져요.”(‘뷰잉’) 누군가는 집에 가고, 누군가는 가지 못한다. ‘에어 메이드 바이오그래피’의 장인은 집에 갔고, ‘뷰잉’의 맹선생은 가지 않았다. 한국에 가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맹선생은 “네, 그다지.”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믹스 커피를 마신다. 그녀가 아무리 맛있는 커피도 이것만 못하다고 한 커피가 바로 믹스 커피다. ‘멀리 떨어진 고국처럼 느껴지는’ 맛이라는 화자의 친절한 주석까지 달렸으니 그 대답에서 30년 이상 산 교민의, 내재화되어 버린 노스탤지어를 읽지 못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은유적으로는,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다. 우리는 모두 집에 가고 싶다. 어디서나 우리는 집에 가고 싶다. 집에 있으면서도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까 문지혁에 의하면, 집은 ‘있는’ 곳이 아니라 ‘가야 하는’ 곳이다.

김인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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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숙·소설가


♦래빗 인 더 홀

전작 ‘휴먼의 근사치’를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미래의 세계를 배경으로 했던 그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매혹은 ‘미래’라는 시간의 세계가 아니라 김나현의 소설 속 인물들의 세계였다. 첫 장편보다 뒤늦게 나온 첫 소설집에서는 김나현의 인물들이 더 가까이 보인다. 그들은 눈이 없는데도 앞을 ‘보는’ 사람들이고, 소망하는 것과 좌절하는 것의 사이를 ‘보는’ 사람들이고, 겨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고, 그리하여 마침내 ‘눈 똑바로 뜨고 있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저 성실하고, 그저 주어진 대로만 살고, 그러면서도 불평하지 않는 사람들- 불평하는 것의 의미가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말하자면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 소설 ‘앙배의 이야기’에는 이런 대사도 나온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그냥이야?” 그러게. 그냥이라니.

툭툭 던지는 듯한 문장들, 단서들은 - 삶에 대해서이거나 소설에 대해서이거나 - 집요하게 탐구되는 대신 조금씩 어긋나거나 조금씩 감추어진 길을 그저 툭툭 쫓아가는 방식으로 대체된다. 둘이 걷기도 힘든 좁은 길, 남들과는 다른 방향, 그러다가 맞닥뜨리는 구멍. 수많은 구멍들. 스스로 걸어 들어가 마침내 평화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구멍들.

이 소설집에는 김나현의 데뷔작이 실려 있는데, 그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안의 세계’ 이 제목에서 ‘안’은 눈이기도 하고, 내부라는 뜻의 ‘안’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바깥의 세계. 내부를 잃어버린다면 그저 표면에 불과한 세계이다. 그러나 ‘안’을 들여다보며 사는 삶이 어디 쉽겠는가. 침잠하지 않고,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바깥과 화해해가며 사는 삶은. 그래서 ‘안’을 들여다보는 ‘안-눈’은 얼굴에서 사라졌다가 누군가가 그려주어야만 다시 살아난다. 눈을 그려주는 사람들은 그 눈이 들여다보는 안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기도 할 것이다. 데뷔작 외의 여섯편의 작품들 역시 ‘안의 세계’를 채워나가는 작품들로 읽힌다.

작가의 이야기가 쉽게 들린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스토리의 긴장을 한겹 한겹 쌓아가면서 동시에 한겹 한겹 풀어낸다.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보폭이 맞는다는 느낌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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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식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래빗 인 더 홀

김나현의 소설집 ‘래빗 인 더 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너절한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는 환상의 자리를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참으로 능숙하게 소설에 담아내는 작가라는 생각. 흥미롭게도 일상과 환상이 뒤섞이는 장면들의 배후에는 여지없이 ‘사라짐’이 가로놓여 있다. 소설집 전체가 사라짐과 관련된 일상과 환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정도이다. 수록작 ‘안의 세계’는 눈의 사라짐에 대한 소설이다. “전화로 듣기는 했는데, 정말 눈이 없으시네요.”라고 무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정도의 일상적인 환상들이 작품 곳곳에 별것 아니라는 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느 중소기업에서 2년째 인턴을 하고 있는 이레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그녀는 정규직에 근접하는 일이 될까 해서 직장상사 백과장의 출퇴근 카풀이나 전세금 대출 요구를 들어준다. 그런데 백과장은 별다른 이유 없이 회사에 나오지 않다가 어느 날 불쑥 집으로 이레를 찾아온다. 그리고는 자신의 실종이 봉사활동에서 만난 노숙자의 항의와 관련이 있으며 이레는 정규직이 되지 못할 거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이레는 눈이 사라진 부동산 중개업자 방아짐에게 종이 눈을 그려서 붙여주면서 자신도 눈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줄거리 요약이 쉽지 않을 정도로 서사의 진행이 매우 섬세한 작품이다. 노숙자, 백과장, 방아짐, 이레의 관계 사이에 놓인 규칙이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부여되는 타인의 욕망이다. 맛있게 먹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봉사활동을 하는 백과장에게 네 음식은 맛이 더럽게도 없다고 말하고는 사라진 노숙자, 부당한 요구를 수용하면서까지 정규직이 되고 싶어하는 이레에게 너는 정규직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사라진 백과장, 눈이 사라진 상태에서 모든 사람이 가진 눈이 아니라 종이에 그린 눈을 가지고 싶어하는 방아짐 등등.

감각기관으로서의 눈[眼]이 사물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소설 ‘안의 세계’가 꿈꾸는 눈[眼]은 타인의 욕망이 사라진 지점을 응시하고자 한다. 타인의 욕망과 기대가 나를 규정하지 않는 삶, 나에게 부여되는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삶, 바로 그 지점에서 김나현의 환상이 쓰윽 하고 발 없는 유령처럼 지나간다. 물론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생각을 달리할 수 있다. 다만 삶에 잠재되어 있는 삶의 가능성을 환상의 형태로나마 불러들여 잠시나마 들여다보려는 작가의 몸짓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소설은 존재에 대한 호소라는 통념을 거스르면서, 소설은 관계의 사라짐에 대한 응시라고 조용하면서도 격렬하게 말하고 있었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다시 한 번 더 읽어도 좋을 것 같았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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