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6 (월)

‘22년째 저출생’ 한국이 묻는다 “1억 드리면 아이 낳으시겠습니까” [복지의 조건]

댓글 1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억 원 드리면 아이를 낳으시겠습니까?’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에서 비슷한 공약이 나왔을 땐 재밌는 상상 정도로 취급됐죠. 이제는 이 질문이 정부의 공식 설문에 등장했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벌이는 온라인 설문입니다. 부영그룹이 직원들에 출산 장려금 1억 원씩 지급하기로 한 것처럼, 정부도 파격적인 현금을 직접 지원하면 아이를 낳겠냐고 물은 겁니다. 설문을 이달 17일부터 26일까지 진행하는데 24일 오후 4시 현재까지 1만 명이 넘게 참여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동아일보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경제공화당 허경영 대표가 내놓은 벽보에 ‘결혼수당 남녀 각 5000만 원 지급’ ‘출산 때마다 3000만 원 지급’ 등 공약이 적혀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선거역사관 제공


권익위는 1자녀엔 1억 원, 2자녀엔 2억 원, 3자녀 이상엔 3억 원을 각각 지급하는 방안을 예시로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해 출생아 23만 명(잠정 집계)에게 1억 원씩 주면 연간 23조 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이런 재정 투입에 동의하는지도 물었습니다.

● ‘출생아에 1억 원씩’ 가능한가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냐고 물으신다면, ‘재정만 따지면 불가능하진 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은 나라가 이미 국가 재정에서 그만한 비중을 가족복지에 쓰고 있거든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국내 가족복지 공공사회 지출은 30조253억 원이었습니다. 아동수당과 출산휴가 지원금, 어린이집 보육료 등이 여기 포함됩니다.

이 돈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6%였습니다. 직감하셨겠지만 이 비율이 다른 OECD 회원국보다 상당히 낮습니다. 38개국 중 뒤에서 8번째입니다. 잘못 읽으신 게 아닙니다.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입니다. OECD 평균은 2.1%였습니다. 어리둥절하실 수 있습니다. 정부가 저출생 극복을 위해 300조 원을 넘게 투입했다는데 OECD 평균만도 못한다니요. 그 돈은 다 어디 갔을까요. 적잖은 돈이 ‘흉내 내기’였습니다.

동아일보

국민권익위원회가 ‘국민생각함’ 사이트에서 벌이는 온라인 설문. 출산 가정에 파격적인 현금을 지원하는 게 저출생 극복에 도움이 되겠냐는 취지입니다. 국민생각함 캡처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가 2022년 저출산 대응 예산 총 51조216억 원을 분석했더니 실제 국민이 받는 돈보다 부풀려져 있거나 저출산과 관련이 없는 정책의 예산이 상당수 섞여 있었습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주거 지원 예산(23조4012억 원) 가운데 40%(9조5300억 원)가 ‘빌려줬다가 돌려받는’ 융자 지원이었던 겁니다. 저출생 문제를 두고 ‘백약이 소용없다’고들 하지만 “정말 백약을 다 써본 거 맞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동아일보 5월 24일자 「학교 현대화-성범죄 피해지원도 ‘저출산정책’이라니…」 참고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30524/119446250/1)

주목할 점은 한국보다 합계출산율이 높은 나라들이 더 많은 재정 비중을 가족복지에 쓰고 있다는 겁니다. 이 비중이 OECD 1위인 스웨덴은 합계출산율이 1.7명(2020년 기준)입니다. 같은 해 한국(0.8명)의 2배 수준입니다. 스웨덴은 그해 GDP의 3.4%를 가족복지에 썼습니다.

우리나라 경제 규모에 대입하면 스웨덴은 64조2876억 원을 가족복지에 쓴 셈입니다. 그해 한국의 관련 지출보다 34조2623억 원이 더 많았던 거죠. 우리나라가 그해 출생아 27만2337명에게 전부 1억 원씩 줬어도, 출산율이 한국의 2배 수준인 스웨덴의 관련 예산에도 못 미쳤을 거란 뜻입니다.

물론 이건 재정 측면에서만 분석한 겁니다. 출생아 1명당 1억 원을 주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생각이 없는 남녀가 돈만 노리고 출산하는 등 부작용이 쏟아지겠죠. 이를 보완하려면 단번에 큰돈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다달이 나눠주는 기존 아동수당 등의 액수를 올리면서 수급 조건에 아동학대 예방 교육 수료 등을 붙여야 할 겁니다.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는 지난해 12월 인천시가 발표한 ‘1억 플러스 아이드림(i dream)’ 정책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인천시는 관내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동에게 18세까지 총 1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고 있는 임신·출산 의료비(100만 원)와 부모급여(1800만 원), 아동수당(960만 원) 등 7250만 원에 인천시가 2870만 원을 더 줘서 총 1억 원 이상을 맞춘다는 겁니다.

출생아 1명당 2870만 원을 주는 데 드는 총액은 지난해 출생아 23만 명 기준으로 7조 원 안팎입니다. 적은 돈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예 논의조차 못 할 규모인지는 의문입니다. 지금은 국가 소멸까지 거론되는 상황 아닌가요.

● 22년째 ‘저출생 무력감’ 차곡차곡 쌓아온 한국

24일 통계청이 올해 2월치 출생아 수를 발표했습니다. 지난해 2월(2만20명)보다 더 줄어서 1만9362명이 태어났습니다. 2019년 11월 이후 52개월 연속 감소입니다. 충격받으셨나요? 충격받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을 거라는 데 제가 나중에 받을 한 달 치 국민연금을 걸겠습니다.

동아일보

우리 사회가 저출생에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한국은 2002년 이후 줄곧 합계출산율이 1.3명 이하였습니다. 출산율 1.3명 이하인 나라는 ‘초저출산국’으로 분류됩니다. 독일 막스 플랑크 인구연구소의 한스-피터 쾰러 박사가 2002년 ‘가장 낮은 출산율(lowest-low fertility)’이라며 내놓은 개념입니다. 출산율이 1.3명보다 낮은 나라가 극히 드물고, 그 정도 출산율이 45년간 지속되면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취지였습니다. 쉽게 말해 한국은 전 세계 어디서도 ‘가본 적 없는 길’을 22년째 뚜벅뚜벅 걷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은 이 기준에 따르면 22년째 초저출산국입니다. 위기를 느끼는 감각이 마비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칼럼은 “14세기 흑사병 때보다 심각하다”고 했습니다. 올 2월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단순한 대책으로는 대응이 어렵다”고 경고했습니다. 만국이 ‘우리는 한국처럼 되지 말자’며 각오를 다지는데 정작 당사자인 한국만 태평합니다.

며칠 전 ‘이럴 바엔 차라리 출산율 0명을 한 번 찍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칼럼을 썼습니다. 욕먹을 각오를 했는데 의외로 주변에서 ‘건희야, 네가 맞는 말을 할 때도 있구나’라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어차피 0.65명(지난해 10∼12월 기준)이나 0명이나 장래가 어둡기는 매한가지인데 차라리 바닥을 찍어보자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동아일보 4월 22일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출산율 0명’에 도전해보자」 참고 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240421/124584219/1)
동아일보

동아일보 2003년 8월 28일자 A14면 기사. 2002년 합계 출산율이 1.17명으로 떨어졌다며 걱정하는 내용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얼마나 부러운 걱정인가요. 동아일보는 올해 1월부터 「출산율, 다시 ‘1.0대’로」기획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인구학자들은 실제로 출산율 0.65명이 1.0명보다는 0명에 더 가까운 수치라고 얘기합니다. 인구의 ‘복리’ 효과 때문입니다. 가임기 여성이 평생 2.1명을 낳으면 인구가 유지되죠. 평생 0.65명이면 신생아가 3분의 1로 줄어들 것 같지만 실제론 두 세대 후에는 10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아이 중 절반 정도는 아들이고 절반만 나중에 ‘가임기 여성’이 될 거라서 그렇습니다.

● 이민과 AI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간혹 저출생을 이민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인공지능(AI)이 발전해 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생산가능인구가 많지 않아도 된다는 예측도 있습니다. 한국은 인구 밀도가 너무 높으니 사람이 좀 줄어도 괜찮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저는 이런 주장과 예측이 모두 들어맞아서 미래 한국이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지만 이 점을 고려해봅시다. 이민에 가장 열려있던 나라들이 최근 이민으로 인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요. 한국의 사회문화는 이민에 열려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나라가 앞으로 수십 년간 전 세계 어디서도 겪은 적 없는 속도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규모의 이민 인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AI는 어떻습니까. 이민과 달리 AI가 어떤 사회적 문제를 초래할지 다른 나라의 선례를 참고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이 그 모든 부작용과 혼란을 가장 먼저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나라가 됩니다.

보통 ‘한국의 장래가 어둡다’고 할 때 노년 부양비를 대표적인 지표로 듭니다. 지금은 생산가능인구(15~64세) 4명당 노인 1명을 부양하지만, 약 40년 이후엔 일대일로 부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쉽게 간과하는 게, 이런 암울한 예측마저 출산율이 1.09로 회복될 거란 희망적인 시나리오에 기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통계청은 장래인구추계(중위)에서 합계출산율이 2025년 0.65명으로 저점을 찍은 뒤 서서히 회복해 2049년부터 쭉 1.09명을 유지한다고 내다봤습니다. 최악을 가정한 저위 추계도 ‘2026년 0.59명으로 최저점 후 2044년부터 0.81명 유지’로, 지금보다 높은 출산율을 가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국민연금, 건강보험, 국방, 교육 등 모든 사회 체계의 장래 예측이 이 ‘1.09명’ 시나리오를 토대로 세워진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토록 우려하는 암울한 미래가, 기를 쓰고 출산율을 1.09명으로 회복해야 만날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