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우리집 냉장고의 반정부 양배추 [아침햇발]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25일 서울 시내 한 마트의 매대에 양배추가 진열되어 있다. 정세라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정세라|뉴스서비스부 기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875원 대파’ 세일이 최근 조용히 끝났다. 정부 할인 지원에 하나로마트 자체 할인을 보태 ‘합리적 가격’이란 대통령의 찬사를 끌어냈던 그 세일을 이제 못 누린다. 원래 총선 직후 종료였는데 쏟아지는 눈총 탓에 열흘 남짓 연장됐던 이벤트다. 외신조차 ‘green onion president’를 입에 올리며 떠들썩한 한철을 보냈으니 애물단지 세일을 치워버리고 싶었던 마트 경영진의 속앓이를 왜 모르겠는가. 심심한 유감을 전한다.



느지막이 마트에서 1480원 ‘민생 대파’를 한 단 샀다. 날이면 날마다 대파로 시끄러웠건만 그 유명한 대파 할인 영접을 못 해봤다. 장보기는 거의 온라인으로 하는데다 대체로 깐대파만 써서 그랬다. 흙대파를 사면 손질해서 냉장고에 넣어야 하는데, 흙대파를 싱크대 앞에 부려놓는 순간 한숨이 날 테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냉장고에 밀어넣을 테고, 안 그래도 한번 씻어 말려야지 하고 일년째 노려만 보고 있는 냉장고 야채칸은 흙대파 파편들로 더 엉망이 될 테니까. 흙대파에 640원 30% 할인 지원을 해준 정부는 깐대파를 먹는 사람은 유한계층이라 그런지, 한 푼도 지원을 안 해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쌀 때는 2천원대 초반, 비싸 봐야 2천원 후반을 오가던 500g 깐대파 한 팩 가격은 한때 4천원을 바라봤고, 지금도 크게 안 내렸다.



정부의 신선식품 물가 잡기는 두더지 잡기 게임을 떠올리게 한다. 사과 값을 누르면, 대파 값이 튀어나오고, 대파 값을 잡으면, 양배추 값이, 당근 값이, 오이 값이 튀어 오른다. 체감도도 그리 크지 않다. 농림축산식품부 할인지원은 품목에 따라 20~30%를 깎아줘 일주일에 1인 1만원 한도로 장바구니 시름을 덜어주겠다는 정책이다. 시세에 따라 품목을 바꾸는데 현재는 사과, 배, 대파, 시금치, 청양고추, 토마토, 당근, 양배추 등 13종이 대상이다.



정부가 1만원 할인을 해준다니 감사하지만 사실 이 한도를 제대로 누려보기는 쉽지 않다. 애초 유통사마다 취급 품목이 다를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다니는 대형마트에선 할인 품목이 대파, 사과, 배 정도만 눈에 뜨인다. 아파트 내 중소마트는 정부 할인 품목이 훨씬 많지만 농식품부 할인을 붙여봐야 대형마트랑 가격이 같거나 더 비싸다는 건 ‘안 비밀’이다. (중소마트에선 배추 한 포기가 정부 할인을 붙여 5980원인데, 대형마트에선 정부 할인 없이 2980원이다. 단, 오픈런을 해야 한다. 마트 직원은 물량이 얼마 안 되니 아침 일찍 오라고 귀띔했다.)



여튼 640원 할인해주는 대파는 2단 한정이고, 배는 큰 거 2개에 1만9900원 하는 걸 30% 할인해서 1만3930원이다. 아무리 할인을 해줘도 제사 지낼 것도 아닌데 할인받자고 1개에 7천원짜리 배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옆에 한 봉지에 3~6개짜리 좀 자잘한 배는 1만9900원인데 그건 정부 할인 품목이 아니다. 아무래도 배 할인은 진정한 유한계층을 배려한 특별행사인 듯하다. 난 깐대파를 사는 유한계층인 줄 알았는데 배는 못 사는 사각지대 계층이었다는 깨달음이 온다. 사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5~6개에 1만2700원짜리는 30% 할인을 해주는데, 10개짜리 못난이 사과 한 봉지는 1만7900원으로 할인을 안 해준다.



정부는 3월 중순에 1500억원 농축산물 긴급가격안정자금 투입을 발표했고, 4월 초엔 무제한·무기한 투입도 약속했다. 사실 중간 유통단계에 들어가는 돈을 빼면 소비자가 직접 체감하는 할인쿠폰 예산은 680억원 정도다. 2200만가구이니 가구당 3천원꼴이다. 그런데 이 예산이 4월10일 기준으로 40%가량이 소진됐다고 한다. 어떤 매체가 예산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고 차기 예산 배정을 걱정하는 보도를 하자, 농식품부는 득달같이 이 정책의 목표는 ‘국민 체감을 위한 신속 집행이 핵심’이라고 반박했다. 실소가 나왔다. 정책 시행이 한달 가까이 됐는데, 가구당 1500원어치도 덕을 못 봤다. 이를 어쩌나. 민생 대책 체감이란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투표소 앞 대파 시위는 끝났다. 하지만 마트에선 반민생 토마토, 반민생 파프리카, 반민생 오이, 반민생 당근이 도처에서 반정부 시위 중이다. 간만에 민생 흙대파를 까고 씻어 냉장고 야채칸을 열었더니 비싸게 산 우리집 반민생 양배추가 거뭇거뭇 곰팡이를 뒤집어쓰고 있다. 양배추야 너 왜 이러니. 너 반 통에 6천원이 넘는 애야. 너마저 반정부니?



seraj@hani.co.kr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기획] 누구나 한번은 1인가구가 된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