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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유석재의 돌발史전] “함석헌 앞에서 지팡이 짚고 파이프 담배 쥐었던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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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교수가 회고한 함석헌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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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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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세인 김숙희 전 교육부 장관이 신문에 나온 것은 얼마 전 총선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https://www.chosun.com/opinion/2024/04/08/CZZGKWZF55GJFG3D52P4H367DA/) 그는 철학자인 도올 김용옥의 누나이자 고려대 화학공학과 교수를 지낸 원로 학자 김용준(1927~2019) 교수의 누이동생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대단한 재능을 지닌 남매들이 조금씩 다른 분야에서 그 재능을 변주시키는 예가 많은데, 대표적인 예로 첼리스트 정명화-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정명훈 남매와, 연극배우 김지숙-프로복서 김지원-영화감독 김지운 남매, 작곡가 진은숙-음악평론가 진회숙-미학자 진중권 남매, 언론인 김윤덕-방송인 김성주 남매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용준 교수에 대해 기억하자면, 저도 대담 취재를 위해 만난 적이 있는데, 대단히 사려 깊고 신중하면서도 불의를 참지 못하는 유형의 인물이었습니다. 본인의 친동생인 김용옥 교수가 한창 방송에 많이 나올 무렵인 2004년에 신문 대담 중 대놓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내 동생이 아니면 구경을 잘 하겠는데. 친형이다 보니 그게 쉽질 않네. 야단스럽게 구는 것 보면 그만 두었으면 하는 게 내 심정인데. 어떻게 보면 정치에 밀착해서 가는 것 같은 데 나는 반대고, 나는 걔 방송은 잘 안 봐요. 그야말로 상식적인 걸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는데 사실 동감이요. 매스컴에 안 나오면 불안해지는 강박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김용준 교수는 한국학술협의회장을 지낼 정도로 학문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20세기 한국 재야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함석헌(1901~1989)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2006년에 나온 함석헌 평전 ‘내가 본 함석헌’(아카넷)은 바로 김용준 교수가 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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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함석헌(왼쪽) 선생과 김용준 교수./아카넷


1949년 봄, 종로 YMCA 회관 앞을 걷고 있던 스물 두 살 청년 과학도 김용준은 ‘성서강해 함석헌’이라 써 붙인 광고에 눈길이 끌렸습니다. “바깥의 환한 빛을 등뒤로 받으면서 삐거덕거리는 낡은 목조건물의 2층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이상하게 그렇게 행동한 거지요. 어둡고 긴 계단이었습니다.” 김용준은 거기서 49세의 함석헌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처음 본 그의 모습을 ‘스무 살에 만난 빛의 메시지’라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전공인 유기화학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함석헌으로부터 배웠다고 할 만큼 김 교수에게 함석헌은 정신적 스승이자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그 책은 단순한 평전을 넘어서 저자가 함석헌과 함께 경험했던 20세기 한국 현대사에 대한 회고와 평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북 분단과 6·25, 4·19와 민주화라는 역사적 격변기 속에서 꽃피웠던 함 선생의 사상과 그가 ‘씨알(민중)’을 향한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과정을 보여줍니다. 김용준 교수는 “자기를 찾는 노력, 역사의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함 선생의 메시지를 젊은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것”이라며 “내 노년의 마지막 지적 작업”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함석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 간간이 저자 김용준 자신의 편력과 잊지 못할 비화들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된 에피소드 몇 가지는 한국현대사에서 상당히 중요할 수 있는 단면들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함석헌과 김대중에 대해서 언급한 대목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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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선생님에게 직접 들은 신비경험을 말해야 할 것 같다.

그 신비경험이란 다음과 같다. 즉 새벽마다 엎드려 기도드리는 시간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날 하루가 눈 앞에 정확히 전개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사람이 오후 3시에 당신을 만나러 오는 환상을 보게 되면 틀림없이 환상대로 그 사람이 그 시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새벽에 엎드려 기도드리는 시간에 나타나는 환상에서 그날 하루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대로 연출된다는 것이다.

한때는 재미가 나서 이런 신비경험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큰일났다 싶어 그 버릇을 고치느라고 한참 혼이 났다는 말씀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언젠가 김지하 시인과 나눈 일이 있다. 이 말을 들은 김 시인은 곧바로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정신착란증인데 함 선생님의 위대한 점은 그것을 버릴 수 있었다는 데 있다고 하였다.(65~66쪽)

여기서 새삼 1971년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을 상술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만 1971년이 저물어가던 12월 초 전국의 대학 교무위원급 교수 수백 명이 숙명여대 강당에 모여 당시 문교부 장관인 민관식씨의 사회로 당시 중앙정보부 제8국장 강인덕씨의 시국강연을 듣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들은 강연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하지도 못하고 또 기억할 필요도 없지만, 그 날 밤 강연회가 끝난 다음 숙명여대 정문에서 남영동 큰 도로까지 걸어 나오면서 눈물을 삼킨 일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전국 대학의 수장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대제학이라 할 수 있는 문교부장관의 사회로 중앙정보부 일개 국장이 강연하는 것을 꼼짝 못하고 들어야 하는 초라한 내 모습이 참담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209쪽)

1979년 5월 8일 함 선생님 사모님 1주기 추도예배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보기로 하겠다.

사모님의 1주기 추도예배를 일정한 장소를 택하여 성대하게 치르자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함 선생님이 극구 사양하여 외부에 알리지도 않은 채 조촐하게 가족을 중심으로 친지 몇 분이 원효로 선생님 댁에서 모이게 되었다.(중략)

나는 사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국내에 없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찍 선생님 댁을 찾았다. 김(동길) 박사가 추도사를 끝내고 자리에 돌아와 좌정할 무렵 조용한 분위기가 갑자기 다소 흔들리는 듯하더니 김대중씨가 온다는 전언이 왔다. 신문에서 그리고 말로만 듣던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직접 가까운 데서 만나게 되었다는 설렘 같은 걸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내내 마루의 창문 옆에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계시던 함 선생님 앞에 김대중 씨가 드디어 그 모습을 나타냈다. 왼손에는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좌우로 세 명씩의 수행원을 대동한 채, 마루 위에 겸허하게 서 계신 팔십 노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김대중씨의 모습에서 신문에 자주 소개된 병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뻘인 늙은 선생님 앞에서 지팡이를 딱 짚고 서 있는 그 태도에서 나는 도무지 추도예배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김동길 박사가 내 어깨를 흔들면서 나가는 것이 어떠냐는 눈짓을 보내 함께 일어서서 앞에 무릎꿇고 앉아 계신 몇몇 분을 헤치고 나와 그 장소를 떠났다. 나오면서 정면에 서 있는 김대중씨와 악수를 나누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김대중씨를 직접 대한 단 한 번의 만남이었다. 김 박사의 자동차에 몸을 싣고 돌아오면서 그때까지 몇 차례 김대중씨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이 그렇게 잘못된 판단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였다.(309~311쪽)

(10.26 직후) 어느 날 나는 노명식 교수, 이미 타계한 조요한 교수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요즘은 그런 풍경이 사라졌지만 그때는 신문의 가판이 성행하고 있었다. 노 선생이 때마침 신문을 사서 펼치더니 별안간 “김 선생 이것 어찌된 거야?” 하며 신문을 내게 내밀었다. 신문에는 함석헌 선생님이 김대중씨의 출마를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럴 리가 없다 싶어 곧바로 선생님 댁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선생님이 직접 받으셨다.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평소와는 달리 흥분된 어조로 “큰일낼 사람들이오. 이 노릇이 다아 돈노름이오.”하고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전화를 끊고 셋이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사연인즉 다음과 같았다. 전날에 당시 선생님 주변의 한 명사의 부인이 성명서를 들고 와서 지지 성명을 해 달라고 부탁드렸다는 것이다. 그 성명서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의 원만한 합의에 의한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내용의 글이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것을 다 읽고 나서 별지에 서명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음 날 김대중씨 지지성명으로 둔갑한 것이었다.(315쪽)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일일이 거명하지는 않지만--전두환 대통령을 둘러싼 당시의 쟁쟁한 문인들이 보여준 아부상이다. 언젠가 ‘25시’의 작가 게오르규가 방한하여 한 강연에서 “문인은 잠수함에서 사육되는 토끼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 것을 필자는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다. 나는 문학을 잘 모르지만 그 수많은 원로시인들이 연출했던 추태에 지금도 분노를 느낀다.(358쪽)

(함석헌) 선생님의 마지막 공식행사는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면서 서울평화대회 위원장으로 추대된 일이다. 일부에서는 선생님에 대한 비난이 적지 않았다. 어떻게 선생님이 노태우 대통령과 나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병상에 누워 계시던 선생님은 “아니 그러면 평화를 사랑한다면서 나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악수도 하지 말란 말이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면서 불편한 몸을 추스려 성화 점화식에 나가시는 선생님의 뒤를 좇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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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의 인물, 특히 현대사의 인물들은 숱한 증언과 수기(手記)와 자료와 문서들에 의해 복기됩니다. 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야 제대로 된 1차 사료로서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김용준 교수 같은 사람의 기록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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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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