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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헌재 “패륜가족 상속 인정하는건 국민 감정에 어긋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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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 ‘유류분’ 제도 위헌]

‘구하라법’ 입법 사실상 강제 결정

혈연 무조건 상속 시대착오 비판에

불효자-자녀 학대 부모 상속 못받게… 핵가족화 맞춰 재산권 보장 변화

동아일보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유류분 제도에 대한 헌법소원 및 위헌법률심판 선고를 앞두고 재판관들이 착석해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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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평균수명 연장, 남녀평등 실현 등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현실에도 불구, 유류분 제도는 지난 47년 동안 단 한 번의 개정도 없이 신설 당시 모습 그대로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입법자는 이번 헌법불합치 결정을 계기로 유류분 제도의 입법 개선을 도모해 현실에 부합하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제도로 탈바꿈시켜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25일 유류분 제도에 대해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국민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제도가 현실의 변화와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법조계에선 “헌재가 시대 변화에 적극 부응한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고인이 남긴 유언의 취지를 최대한 구현하는 한편, 핵가족화 등 시대 변화에 맞게 재산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결정이기 때문이다.

● 헌재, 사실상 ‘구하라법’ 입법 강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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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민법상 상속은 ‘유언’을 가장 우선시한다. 유언이 없을 경우 자녀·손자녀 등 직계비속이 1순위, 부모·조부모 등 직계존속이 2순위, 형제자매가 3순위로 재산이 상속되고, 배우자는 공동 상속인이 되거나 이들이 없을 경우 단독으로 상속을 받는다.

고인이 유언을 남기더라도 상속인들이 최소한으로 받을 수 있는 상속재산의 비율을 정해놓은 것이 유류분이다. 예를 들어 배우자, 아들, 딸이 있는 남성이 딸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고 유언을 남겼더라도 배우자와 아들도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내면 일부 재산을 받을 수 있다. 1977년 개정으로 처음 법제화된 유류분 조항은 자녀와 배우자는 법정 상속분의 2분의 1, 부모와 형제자매는 법정 상속분의 3분의 1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했고, 현재까지 유지돼 왔다. 특정 상속인이 유산을 독차지하는 것을 방지해 남은 유족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안전장치 역할을 한 셈이다.

하지만 혈연이라고 해서 무조건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이 계속 제기돼 왔다. 배우자를 때린 가정폭력 사범, 자녀를 버리거나 학대한 부모, 부모와 연락을 끊은 자식 등 일명 ‘패륜 가족’도 상속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령사회로 상속 연령이 높아지면서 ‘유족의 생존권 보호’라는 당초 입법 취지도 무색해졌다.

실제 아이돌그룹 출신 가수 구하라 씨가 2019년 사망하자 어린 시절 집을 나갔던 친모가 상속을 주장하고 나서 논란이 커지기도 했다. 당시 구 씨의 오빠가 “부양 의무를 저버린 친모는 동생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없다”는 입법 청원을 국회에 올려 시민 10만 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이후 ‘패륜 가족’은 상속권을 박탈하는 이른바 ‘구하라법’이 발의됐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현재도 계류 중이다.

이 때문에 헌재의 이날 결정은 구하라법 입법을 사실상 강제하는 결정으로 풀이된다. 헌재는 “피상속인을 장기간 유기하거나 정신적·신체적으로 학대하는 등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은 상속인의 유류분을 인정하는 것은 일반 국민의 법 감정과 상식에 반한다”며 “유류분 상실 사유를 별도로 규정하지 아니한 것은 불합리하다”고 밝혔다. 조웅규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유류분 권리자라도 일정한 경우에는 유류분을 행사할 수 없다는 내용의 입법 개선을 요청한 것으로 진일보한 판단”이라며 “국회는 ‘구하라법’을 적극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 간병 등 ‘기여분’은 인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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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는 이날 간병 등으로 가족을 특별히 부양하거나 재산 증가에 기여한 것을 뜻하는 ‘기여분’을 유류분 산정 시 제외해야 한다는 취지의 결정도 내렸다. 재산 상속에선 민법상 ‘기여분’이 인정되지만 ‘유류분’을 정할 땐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민법 1118조 부분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것이다. 헌재는 이 조항 역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상속에서의 기여분 제도와 유류분 제도는 단절된 상태로 남아 있다”며 “이 때문에 기여의 보답으로 상속을 받고도, ‘비기여 상속인’에게 반환해야 하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헌재는 공익 기부, 가업 승계 등 목적으로 증여한 재산도 유류분을 산정하는 ‘기초 재산’에 예외 없이 포함시키도록 하는 민법 1113조 1항, 유류분 권리자에게 손해를 끼칠 목적으로 증여한 경우에는 증여분을 기초 재산에 포함하는 민법 1114조는 합헌으로 판단했다.

법조계에선 “헌재가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계정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농경사회의 유산인 유류분 제도를 이제는 현대사회의 특성에 맞게 개혁해야 함을 천명한 결정”이라며 “유류분 제도의 개정이 더는 미룰 수 없는 시대의 과제가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장은지 기자 jej@donga.com
최미송 기자 cm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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