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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중국에 대응조치하라”… 마르코스 딥페이크에 필리핀 ‘시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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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 목소리로 대중국 강경 조치 촉구
진짜 아닌 AI로 유사하게 만든 '딥보이스'
자칫 외교 문제로 비화…정부 발 빠른 부인
한국일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회담하고 있다. 마닐라=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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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행동으로 필리핀 국민이 상처받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필리핀군이 즉각 대응조치에 나서야 한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이 중국을 향해 단호한 대응을 주문하는 듯한 내용의 음성 파일이 급격히 확산돼 필리핀이 들썩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진짜 음성처럼 조작해 만든 ‘딥페이크’ 파일이었다. 딥페이크가 단순한 장난이나 범죄를 넘어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까닭에 현지 정부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단 한 명의 개인도 타협 안 해" 마르코스 주장?


25일 필리핀 PNA통신 등에 따르면 헤서스 크리스핀 레물라 필리핀 법무장관은 이날 국가수사국에 “대통령 가짜 음성 파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신속하고 포괄적인 조사로 사기 행위 배후에 있는 인물에 책임을 묻고 법적 대응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혔다.

발단은 22일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한 음성 파일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 중국의 행동으로 필리핀 국민이 상처받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 우리에게 정당하게 속한 것을 보호하기 위해 단 한 명의 개인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목소리가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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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5일 중국 해경 함정(왼쪽)이 남중국해 스플래틀리 군도 세컨드토마스 암초 인근에서 재보급 임무를 위해 항해하던 필리핀 선박을 향해 물대포를 발사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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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군이 즉각 대응조치에 나서야 한다’거나 ‘중국과 신사협정을 맺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을 조사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중국 해경 선박이 남중국해를 항해하는 사진이 배경화면으로 사용됐다. 사실상 중국과의 ‘전면전’ 선언인 까닭에 해당 영상은 일파만파 번졌다.

필리핀 정부는 즉각 ‘가짜뉴스’라고 선을 그었다. 대통령소통실은 24일 “대통령은 군에 특정 외국에 대응하라는 지시를 고려한 적도, 내린 적도 없다”며 “나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누군가 악의적으로 배포한 콘텐츠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교 문제로 비화할라'… 정부 신속 조사


당국은 이를 ‘목소리 딥페이크’인 ‘딥보이스’로 보고 있다. 인공지능(AI) 딥러닝(심화학습) 기술로 ‘진짜 같은 가짜’ 목소리를 만들었다는 의미다. 실제 인물과 목소리가 거의 똑같아 일반 시민들로서는 진위 여부를 분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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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 브라우너(왼쪽 두 번째) 필리핀 육군 참모총장과 윌리엄 저니(맨 오른쪽) 미군 훈련소장이 미국-필리핀 연례합동훈련 '발리카탄'이 시작된 지난 22일 필리핀 마닐라 케손시 필리핀군 사령부에서 팔짱을 끼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마닐라=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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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수장을 사칭한 딥페이크가 자칫 국가 간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판단에 필리핀 정부가 수사에 나서기로 한 셈이다. 데일 드 베라 대통령소통실 차관은 “국가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라며 “그간 대통령이 춤을 추거나 노래하는 등 장난스러운 딥페이크가 있었지만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좀처럼 수그러지지 않고 있다. 필리핀과 중국 간 해상 갈등이 날로 격화하고 있는 데다 공교롭게도 음성이 공개된 지난 22일부터 남중국해상에서 필리핀과 미군 1만6,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연례 군사훈련 ‘발리카탄’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등에서는 여전히 마르코스 대통령의 강경 대응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믿는 이들도 있.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딥페이크·딥보이스 범죄는 여러 나라에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항복 선언’ 가짜 음성이 유튜브에 퍼졌던 게 대표적이다. 올해 1월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음성이 담긴 가짜 전화를 받은 유권자들이 “바이든 전화를 받았다”고 착각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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