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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전국민 25만원 주면 물가 오른다? 서민 위협하는 '미신'에 불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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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강 금융평론가(linsk@hanmail.net)]
정부가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주장은 민주당이 제안한 '전 국민 민생회복지원금' 정책을 반대하는 주요한 논거이다. 가계가 지원금을 받더라도 그만큼 물가가 올라버리면 실질소득에는 변함이 없을 텐데 그런 정책을 펼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이 주장은 얼핏 들으면 가치 중립적이고 타당한 명제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럴듯한 이 주장은 참이 아니며 가치 중립적이지도 않다. 자본가 계급은 예부터 이 주장을 노동자·서민의 이익을 공격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무기로 활용해 왔다.

단순한 이 주장 속의 여러 함의는 노동자·서민의 이익에 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이 주장 가운데 정부 지원금이 가리키는 것은 맥락상 사회경제적 목적을 가진 공공 지출에 한정된다. 금융기관을 구제하기 위한 공적자금, 대자본을 도와주는 여러 보조금은 여기에서 말하는 정부 지원금에 포함되지 않는다. 사회경제적 목적을 가진 대표적인 공공 지출은 복지 지출이다. 곧, 정부가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주장은 결국 복지 지출을 줄이자는 얘기이다. 이는 국가의 재분배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돈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주장은 돈을 풀 필요가 없다는 것, 곧, 작은 정부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정부는 세금을 걷어서 필요한 재원을 마련한다. 세금으로도 부족할 때는 국채를 발행하기도 한다. 그런데 공공 지출을 줄이자는 주장은 세금을 덜 걷자는 것을 함의한다. 누진세를 채택하고 있는 현실에서 세금을 줄이는 것은 부자 감세일 수밖에 없다. 공공 지출을 줄이자는 주장은 국채의 발행을 억제하자는 것도 함의한다. 씀씀이를 최대한 줄여서 빚을 내서까지 나라 살림을 꾸리지는 말자는 얘기인데, 이는 이른바 건전 재정 논리이다.

셋째,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주장은 돈의 움직임과 실물경제의 움직임이 전혀 별개라는 사실을 함의한다. 돈을 풀면 그것은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생산, 고용, 소득과 같은 실물 경제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화폐는 그저 계산단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늘어난다고 해도 실질소득을 높이거나 실업률을 줄이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주장은 정부가 재정을 통해 실업을 줄이거나 노동자에게 도움을 주는 여러 정책을 펴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이 주장은 물가가 오르면 그 해법을 풀린 돈을 회수하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르므로 거꾸로 물가가 오르면 돈을 회수해서 물가를 잡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의 여러 중앙은행들은 대체로 돈 풀면 물가 오른다는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하여 물가가 오르면 그 이유를 따지기에 앞서 기계적으로 정책 금리를 올려서 돈의 규모를 축소하는 정책을 편다. 중앙은행들은 금리 수준과 화폐량의 조절을 고용 규모나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떨어트리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예컨대 미국 연준의 금융정책에서 그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미국 연준의 파월 의장은 언젠가 카토 연구소와 인터뷰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미국경제는 고용시장에서 노동수요가 매우 강하고 높은 임금의 새로운 일자리가 계속 창출되는 불균형에 놓여 있다." 여기에서 보듯 파월 의장은 높은 임금의 새로운 일자리가 계속 창출되는 상황을 불균형으로 인식한다. 파월은 "연준은 정책개입을 통해 상당 기간 추세 이하의 성장을 유지함으로써 노동시장을 균형 수준으로 되돌리고 임금상승률도 2% 물가 목표에 근접한 수준으로 낮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연준이 성장률을 떨어트리기 위해 정책개입을 한다는 얘기다. 파월은 연준의 정책개입 곧 금리 인상의 목적이 화폐 공급량을 줄임으로써 실업률을 높이고 임금을 떨어트리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돈 풀면 물가 오른다는 논리는 예부터 기득권층이 노동자·서민의 이익을 공격하는 논리로 사용되어 왔다. 돈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논리를 세련된 형태로 가다듬은 것이 화폐수량설이다. 이 화폐수량설은 이른바 보수적인 통화주의 이념을 떠받치는 핵심 기둥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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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25만 원의 민생회복 지원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가 지난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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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주의 이념을 떠받치는 기능

영어의 머니터리즘을 번역한 통화주의는, 사실 화폐주의라고 번역해야 맞을 듯한데, 1970년대 중·후반부터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좌표 역할을 하고 있다. 통화주의의 특징은 화폐자본가(금융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논리로서 기능한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통화주의의 바탕에는 돈 풀면 물가가 오른다는 화폐수량설이 놓여 있다. 물론 통화주의의 화폐수량설은 고전적인 화폐수량설을 약간 수정한 것이기는 하다. 이 통화주의는 밀턴 프리드먼이라는 경제학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밀턴 프리드먼이 어떤 사람인지를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통화주의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프리드먼은 1976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그가 노벨상은 받는다는 소식에 스톡홀름의 시상식장 주변에는 엄청난 시위대가 몰려들었다. 그의 노벨상 수상을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시위대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지원한 프리드먼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외쳤다. 시위대는 그를 "독재를 지지한 자유주의 돈키호테"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는 프리드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단면을 보여준다. 여러 명의 옛 노벨상 수상자들도 피노체트 정권을 지원한 프리드먼의 수상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노벨위원회에 보냈다.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는 직접 프리드먼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이처럼 프리드먼의 이름은 독재자 피노체트와 깊게 얽혀있다. 칠레는 1970년에 인민연합의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선거 과정에 닉슨 정부와 CIA가 아옌데의 당선을 막기 위해 은밀하게 공작을 폈던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미국은 아옌데 정권의 국유화 정책, 특히 구리 산업의 국유화를 걱정했다.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은 1973년 9월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결국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렸다. 프리드먼은 이 쿠데타를 지지했고 1974년에는 칠레를 직접 방문하여 여러 차례 강연회와 세미나를 열었다. 프리드먼은 따로 피노체트를 만나 '충격요법'이라 불리는 통화주의 정책의 실험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화폐량의 큰 폭 축소, 6개월 안에 공공 지출의 25% 삭감, 공무원 대량 해고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프리드먼과 피노체트의 관계는 미국의 전략적인 틀 속에서 형성되었다. 미국은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국제개발국을 통해 칠레를 포함한 남아메리카 출신의 학생들이 보수적인 시카고대학 경제학부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미국이 이렇게 한 데에는 라울 프레비쉬라는 경제학자 탓이 컸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레비쉬는 국제연합 라틴아메리카 경제위원회(ECLA) 초대 사무국장이었다. 그는 주류 경제학의 이론과 달리 자유시장이 저개발과 빈곤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안으로서 보호무역, 자본통제, 유치산업 보호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프레비쉬의 주장은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라틴아메리카를 포함한 저개발국가들에서 큰 인기를 얻어 구조주의 경제학파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프레비쉬의 주장이 미국의 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고 보고 포드 재단과 록펠러 재단의 자금 지원으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이에 대항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해 나갔다.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시카고대학에 중심적인 역할을 맡겼다. 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시카고대학에 프리드먼과 같은 보수적인 경제학자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시카고 보이스'라는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자국에서 통화주의 이념을 퍼트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프리드먼이 주장하는 통화주의는 정부의 개입주의, 곧 정부가 돈을 풀어 뭔가를 하려고 하는 온갖 정책에 반대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는다. 프리드먼이 반대하는 개입주의에는 저개발국의 구조주의 이론이나 선진국의 케인스주의가 모두 포함된다. 프리드먼은 현실적 시장을 이념적 시장으로 간주한다. 다시 얘기해서 현실적인 시장은 비인격적인 힘을 통해 이념적인 상태, 곧 균형상태로 이끌려 간다는 것이다. 그의 의견으로는 어떤 형태의 정부개입이든 그것은 경제를 불균형 상태로 빠져들게 한다.

프리드먼은 사회정책이나 소득재분배 정책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완화하려는 재정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돈을 풀어서 고용을 늘리려는 정책은 끝없는 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고용은 현재의 생산자원, 기술, 노동생산성을 반영하는 자연적인 수준에서 결정된다. 만약 그러한 수준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화폐량의 조절이나 재정을 통해서 정책적으로 실업률을 낮출 수 없게 된다. 이는 오직 임금을 낮추는 것만이 실업률을 낮출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을 지속적인 물가상승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생산량에 비해서 화폐가 과잉 발행됨으로써 발생하는 화폐적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화폐의 과잉발행이란, 프리드먼이 보기에는, 재분배정책이나 고용을 늘리려는 정부 정책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재량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화폐량의 발행을 일정 비율로 제한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프리드먼이 정부 지출은 반대하지만 자산 가격이 떨어지는 국면에서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화폐량을 늘리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화폐의 공급을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마치 돈이 모든 사람의 주머니에 골고루 돌아간다는 인상을 심어주려 한다. 물론 화폐가 은행을 통해 공급되면 돈은 담보력이 크고 소득이 높은 사람에게 더 많은 양이 우선적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만 혜택을 줄 것이다.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는 대략 1950년대에 탄생했지만 자본주의 지배계층이 그것을 곧바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그들은 통화주의가 제시하는 권고, 곧, 사회적인 목적의 공공 지출 삭감, 감세, 국채 발행의 축소, 화폐량 증가율의 엄격한 규제와 같은 것들을 현실 정책에 적용하는 데에 망설였다. 그 이유는 통화주의의 실행이 가져올 사회적인 결과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는 국면에서 케인스주의가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통화주의 주장이 호소력을 얻기 시작했다. 자본가 계급은 통화주의 주장에서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 투쟁을 공격할 수 있는 그럴듯한 구실을 찾아냈다. 이후 통화주의는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대처리즘을 거치면서 신자유주의 시기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발전해 간다.

통화주의의 본질은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 예컨대 불황, 실업, 물가 상승과 같은 것들을 노동계급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통화주의는 가치 중립적이라기보다는 계급 편향적이다. 통화주의가 권고하는 정책들, 곧 사회적인 성격의 공공지출 삭감, 감세, 건전 재정 등은 노동자·서민의 희생과 협상력 약화를 내용으로 삼는다. 프리드먼이 줄곧 강조하는 ‘자유’라는 것도 자본이 노동자를 마음대로 착취할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통화주의는 미국 편향적이다.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를 메우기 위해 외국 중앙은행에 달러를 축적해두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세계 시장에 공급되는 화폐량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것이 여라 나라들의 물가 상승을 부추겼다. 미국이 세계시장에 인플레이션을 전가시킨 것인데 통화주의는 거기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노동자·서민의 이익을 공격하는 프리드먼의 통화주의는 윤석열 정부 경제정책의 토대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꼽은 바 있다. 윤석열 정부는 복지 지출의 축소, 부자 감세, 건전 재정, 규제 완화와 같은 통화주의 권고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2008년 글로벌 위기를 계기로 세계적으로 통화주의가 저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윤석열 정부는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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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이 제창한 여러 개념은 실제와 맞지 않을 뿐더러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종사한다는 비판을 오랜 기간 받아왔다. ⓒ시카고대학 홈페이지 갈무리



금융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화폐수량설

통화주의는 돈 풀면 물가 오른다는 논리에 바탕을 둔다. 돈 풀면 물가 오른다는 명제를 이론적으로 조금 더 가다듬은 것이 화폐수량설이다. 화폐수량설이란 화폐량과 물가가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화폐수량설의 역사는 꽤 멀리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기원전 7세기에 쓰인 <관자>에 화폐수량설의 관점이 나타난다. <관자> “국축” 편에서는 화폐량의 증감과 상품 가격의 높낮이를 직접적으로 대응시켜서 설명하는 곳이 나온다.

근대의 화폐수량설은 중금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중금주의란 금과 은, 곧 화폐를 유일한 부(富)로 보는 관점을 말한다. 유럽에서 17세기 전반에 나타난 중금주의는 귀금속 화폐를 부로 간주하고 외국무역에 의해 그 부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중금주의자들은 상품의 단순한 유통 관점에서 "좀도 녹도 슬지 않는 영원한 보화를 형성하는 것을 부르주아 사회의 소명"이라고 올바르게 표명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근대 세계의 최초의 대변자라고 이름 붙였다. 중금주의자들의 정책은 자본의 초기 축적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화폐수량설은 화폐가 부라는 관점에 대립하면서 발전했다. 존 로크는 17세기에 화폐명목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화폐가 부가 아니라는 것을 표현한다. 화폐명목론의 관점에 선 화폐수량설은 따라서 화폐를 유일한 부로 보는 중금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갖는다. 화폐수량설의 함의는 중상주의에 따른 화폐의 국내 유입이 물가 상승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점, 따라서 보호무역 정책이나 무역 통제가 무의미 하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중상주의(중금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갖는다는 점에서 화폐수량설은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화폐를 순전히 환상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화폐가 부의 측면을 가진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은 화폐수량설의 약점이었다.

화폐수량설에 따르면 상품 가격은 화폐량에 의해 결정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상품은 가격이 매겨지지 않은 상태로 유통에 들어가고 화폐도 가치를 가지지 않은 채 유통에 들어가서 교환 과정에서 상품량과 화폐량에 비례해서 가격이 결정된다. 화폐는 부가 아니라는 관점에 따라 화폐수량설에서는 화폐가 축장되지 않고 유통에 머물면서 유통수단 기능만을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화폐는 원활한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실물 부문의 생산이나 고용, 그리고 소득수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화폐의 흐름은 가격 형성 기능을 갖지만 경제 활동을 형성하는 기능은 하지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서 어빙 피셔라는 학자는 화폐수량설을 교환방정식이라는 형식으로 명료하게 표현했다. 그는 화폐수량설을 MV=PT라는 간단한 수식으로 설명했는데, 이 수식은 오늘날에도 널리 사용된다. 여기에서 M은 화폐량, V는 화폐 유통속도, P는 평균적인 상품가격 수준, T는 상품 거래량을 나타낸다. 화폐수량설에서는 화폐유통속도와 상품의 거래량이 일정하다고 가정한다. 그러한 조건에서 화폐량 M의 증가는 평균적인 상품가격 수준 P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MV=PT라는 공식에는 많은 논쟁점이 있다. 먼저 화폐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부터 문제이다. 화폐에는 국가지폐와 신용화폐가 있는데 각각은 전혀 다른 질적인 특정을 갖는다. 국가지폐는 국가의 필요에 의해 발행되는 데 비해 신용화폐는 생산자들의 필요에 의해 발행된다. 두 종류의 화폐 유통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화폐를 정의할 때 이 두 종류의 화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예금화폐의 경우 만기에 따라 화폐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등등 여러 문제가 생긴다. 화폐의 정의는 너무 다양해서 사실은 화폐수량설의 주장자들마저 엄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포기할 정도이다.

화폐의 공급 주체인 중앙은행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쟁점이다. 중앙은행을 정부기구로 볼 것인가 아니면 민간기구 성격을 띠는 기구로 볼 것인가? 화폐수량설에서는 화폐공급량이 평균적인 상품 가격 수준을 결정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를 거꾸로 볼 수는 없는가? 곧, 평균적인 상품 가격 수준이 화폐량을 결정하는 것은 아닌가? 상품에 일반 제조상품과 서비스만을 포함시킬 것인가 금융상품, 부동산까지 포함시킬 것인가? 상품의 유통속도는 정말 안정적인가? 등의 논쟁점이 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화폐수량설과는 달리 평균적인 상품 가격 수준이 화폐량을 결정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화폐수량설에는 많은 쟁점들이 내포되어 있는데, 프리드먼은 화폐수량설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화폐량의 변화는 장기적으로는 실질소득에 무시할 정도의 영향밖에 안 준다. 둘째,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든 화폐적 현상이고 그것은 산출량에 대한 화폐량의 상대적인 증가를 동반한다. 셋째, 단기(5~10년)에는 화폐량의 변화가 산출량의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넷째, 화폐량의 변화는 명목소득과 실질 활동수준의 단기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주요 요인이다. 다섯째, 화폐량의 증가는 단기에는 이자율을 하락시키지만 시간의 경과하면 이자율을 다시 상승시킨다. 따라서 이자율은 금융정책의 지표가 되지 못한다. 여섯째, 중앙은행은 국가 기구로 간주된다. 화폐는 국가기구인 중앙은행이 생산의 필요와 관련 없이 외생적으로 공급한다. 그러므로 중앙은행의 화폐 공급은 규제되어야 한다.

화폐수량설은 추상적으로 설명되고 있지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본질은 정부가 돈을 풀어서 어떤 정책을 펴는 것의 무용성을 보이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화폐수량설은 정부의 재분배, 고용 확대, 노동자 보호 정책에 적대적이고 구매력 유지, 물가 억제 정책에는 우호적이다. 화폐수량설은 노동자 계급의 이익에는 대립적이지만 금융자본가 계급의 이익에는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돈을 풀면 실제로 물가가 오를까?

상품의 가격이 오르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자. 먼저 화폐의 가치 하락이 상품 가격의 상승으로 표시될 수 있다. 화폐의 가치가 하락하면 상대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으로 여러 상품들의 생산조건이나 수요 상황의 변화, 그리고 수입 상품의 가격 변화에 따라 상품의 가격 수준이 오를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가격 상승으로 표시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르다. 자의 눈금이 달라져서 길이가 늘어난 것과 실제로 재려고 하는 대상이 변해서 길이가 늘어난 것은 전혀 다르다. 두 경우 모두 현상적으로는 길이의 증가로 나타나지만 변한 것이 무엇인가는 전혀 다르다. 자의 눈금이 달라진 것을 인플레이션으로, 대상이 달라진 것을 물가상승으로 구분하여 개념 정의하기도 한다.

현실의 물가 상승은 위 두 경우의 조합으로 나타난다. 화폐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상품의 공급 조건이 유리하게 변하면 그 상대적인 변화의 정도에 따라 가격이 오를 수도, 내릴 수도, 그리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화폐가치가 오르는 상황에서 상품의 공급 조건이 불리하게 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곧, 물가의 상승은 화폐량의 변화와 상품의 생산 조건 변화에 근거를 둔 많은 요인들의 결합된 영향을 받는다.

화폐수량설의 관점은 돈을 풀면 곧바로 자의 눈금이 바뀌어 물가가 오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폐량의 변화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그것이 온전히 가격 변화로 흡수될 때 뿐이다. 만약 화폐량의 증가가 실물부문에 영향을 준다면, 그리하여 고용, 생산, 소득에 영향을 준다면 화폐량의 증가는 물가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오히려 물가를 떨어트릴 수도 있다. 화폐량의 증가가 소비와 투자를 자극하여 생산이 증가함으로써 시장에 공급하는 상품량이 증가하면 상품 가격이 하락할 수도 있다. 물론 상품거래에 필요한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화폐량의 증가는 화폐가치 하락과 물가의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한 세대 이상 세계적으로 물가가 안정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때의 상품 가격 안정은 중국을 비롯한 신흥 국가들이 세계시장에 상품 공급을 늘린 덕이 컸다. 이 시기의 특징은 화폐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데도 물가는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화폐수량설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른바 ‘일본 현상’이 나타났다. 1986년에서 90년까지 화폐량은 연평균 10.2%가 증가했다. 그에 비해 같은 기간의 물가상승률은 연평균 1.5%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2~3년 사이에 나타나고 있는 세계적인 물가 상승은 화폐량이 늘어서라기보다는 미중 갈등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 체인이 부서진 탓이 크다.

정리하면, 정부가 돈을 푼다고 해서 그것이 예외 없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르는 상황이 예외적이다. 정부가 돈을 풀 때 물가가 오르기 위해서는 그 돈이 금융시장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아야 하고, 곧, 금융자산의 가격과 이자율에 변화를 주지 않아야 하고, 투자나 생산에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 저축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여러 조건이 들어맞을 때 정부가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여러 조건이 들어맞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 면에서 돈 풀면 물가가 오르리라는 생각은 차라리 미신에 가깝다.

<도움받은 자료>

관중(管仲) 지음, 장승구 외 옮김(2015), <관자(管子)>, 소나무.
니컬러스 웝숏 지음, 이가영 옮김(2022), <새뮤얼슨 vs 프리드먼>, 부키.
칼 마르크스, 김호균 옮김(2017),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중원문화.
요한 판 오페르트벨트 지음, 박수철 옮김(2011), <시카고학파>, 에버리치홀딩스.

[임수강 금융평론가(lins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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