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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팔자 좋은 양반? 먹고사는 데 진심이었다[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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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시험 매달리는 10년 장수생

경비 때문에 소 팔아 가산 탕진도

성공적 농사 위해 ‘불법’ 일삼고

노비 통해 우회적 ‘장사’까지

·

일기·편지·사문서·상소 등 토대

조선시대 지배계급이자 특권층

군내 나는 ‘민낯 생활상’ 되살려

오늘날 세태에 대입해 읽는 재미

경향신문

양반들은 소에 삼베같은 귀중품을 싣고 이를 노잣돈삼아서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하기도 했다. 그림은 김홍도의 ‘노상파안’으로, 소를 타고 가는 일가족이 지나가는 젊은 선비와 마주치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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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과 선비

정진영 지음|산처럼

1권 368쪽·2권 328쪽|1권 2만4000원, 2권 2만원

그 사람 참 양반이네.


이 양반아, 눈깔도 없어?


우리는 일상에서 ‘양반’이라는 단어를 상찬으로, 욕으로, 때로는 ‘저기요’처럼 누군가를 부르는 중립적 호칭으로 다양하게 사용한다. 양반은 고려시대의 문반, 무반을 지칭하던 것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에는 점차 문반, 무반에 소속된 사람과 그 후손, 인척 등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의미가 확대됐다. 양반과 통용돼 쓰이는 ‘선비’라는 단어는 비슷하게 느껴지나 확실한 차별점이 있다. 선비는 공자, 맹자로부터 유래된 말로, <맹자>에서 선비는 “떳떳한 생업이 없으면서도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설명된다. 선비는 학문에 정진해야 하는, 인(仁)과 의(義)로 무장한 전문 지식인 집단이었다.

“조선시대는 양반의 사회였고, 선비의 시대였다.”

조선시대 민중운동사와 향촌사회사 연구의 대가인 정진영 전 안동대 사학과 교수의 말이다. 양반과 선비는 조선의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들 아래의 신분층을 지배했다.”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조선시대 전체사의 구조와 변화를 조망”하는 일이다.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는 양반과 선비의 지배계급으로서의 특권부터 군내나는 생활상까지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책이다. 정 교수가 50여년 동안 조사 발굴한 사료들을 토대로 썼다. 일기, 시문, 편지 등 사적인 기록부터 노비 문서, 자매 문서(자신 또는 처자를 노비로 팔기 위해 쓴 문서), 상소 등 조선시대 고문서와 문집류 등을 토대로 양반과 선비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노비와 사대부 집안의 여성들 등 양반 주변부 사람들의 삶도 함께 다룬다. 단순히 기록들을 나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현 세태에 비추어보면서 저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풀어내 읽는 재미가 있다.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을 보면 몰락 양반의 신분을 산 부농이 일종의 양반 행동 지침을 지키기 위해서 고생하는 장면이 나온다. 절대로 천한 일을 해서는 안 되고, 꼿꼿하게 앉아서 <동래박의>라는 과거시험 필독서를 줄줄 외워야 하는 것 등이다. 실제 조선시대 양반은 어떤 기준에 따라 정해졌을까.

양반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성과 본이다. 원래는 성씨만 있어도 어느 정도 지위가 보장됐으나, 고려시대에 성씨가 지방의 양인에게까지 보급되면서 지역사회 내의 위치를 보여주는 본관까지 따지게 됐다. 향소부곡보다는 군현처럼 큰 단위를 대표하는 본관에 속한 양반들이 힘이 있었다. 양반들 내에서도 본관을 바꾸는 일이 계속되면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작은 고을이나 촌의 이름을 딴 본관은 점차 소멸하게 됐다.

조선은 양반, 상민·천민으로 엄격히 구분되는 신분제 사회였고 양반에게는 수많은 특권이 주어졌다. 사족(사대부가 될 수 있는 혈족)은 경제적으로 몰락해 향족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양반은 기본적으로 토지를 기반으로 경제적, 신분적 특권을 유지해나갔다. 천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질적 기반이 있었기에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도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특히 군역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큰 특권이었다.

가난한 농민이나 노비보다야 삶이 수월했겠지만,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양반의 삶도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양반의 자식은 15~16세가 되면 고을이나 감영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이나 예비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가난한 집안이라면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거나 장자 정도 돼야 공부를 하거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보통은 10년 이상 과거 시험 준비를 했고, 심지어 평생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도 많았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 시험에도 부정행위가 만연해 권세가가 아닌 집안의 양반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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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도’는 사대부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중요 일상을 그린 그림으로, 이중 삼일유가’는 과거 급제자가 3일 동안 광대와 풍악을 앞세워 선배와 일가친척 등을 찾아다니는 길거리 놀이다. 급제자는 행렬 마지막 부분에 어사화를 꽂고 말 위에서 상체를 한껏 젖히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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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의 양반들은 과거를 치르기 위해서 상경해야 했는데, 서울을 오고 가는 데 쓰는 경비는 많은 양반들에게 부담이 됐다. 기록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경상도 단성의 한 선비는 아예 소와 삼베 네 필을 가지고 길을 나섰다. 여정 중에 소와 삼베를 모두 팔아 140냥을 벌고, 이를 경비로 모조리 썼을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과거 준비를 하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몰락 양반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설명한다.

책은 “조선시대 양반이 먹고사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며 양반의 경제생활을 소개한다. 양반은 지주였고, 농사의 성패는 전적으로 지주에게 달려 있었다. 16세기에 신분적 지위를 확고히 한 양반은 많은 노비를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무거운 세금을 견디지 못해 몰락하는 농민을 포섭해 노비로 삼고, 또 노비에게 양인과 혼인하도록 강요했다. 노비가 양인과 결혼하는 ‘양천교혼’은 법으로 금지돼 있었으나, 양반들은 양천교혼을 장려했다. 이렇게 확보한 노동력으로 적극적으로 토지를 개간해 확보했다.

농·공·상이 금지돼 있었음에도 양반들은 노비를 통해 우회적으로 상업활동에 참여했다. 어염(漁鹽), ‘소금과 어물’은 생활 필수품이었다. 양반가에서는 농한기에 노비를 인근의 산지로 보내 어염을 사 온 후에 값을 높게 쳐줄 수 있는 장에 팔아서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 도정 작업에 쓰이는 물레방아 공사나 철제 농기구 생산은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양반가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살림살이가 안정적이지 못했던 양반들은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대구 월촌 지역에 살던 우홍적이라는 양반이 있는데, 그의 셋째 형은 가뭄이 한 달 넘게 지속돼 생계가 어려워지자 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네가 대구 가까운 고을의 찰방 자리라도 얻어서 온다면 식량 떨어질 걱정은 면할 수 있을 것이네”라는 구절에는, 벼슬하는 동생이 일가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다.

‘양반 여성’의 삶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은 완전한 남성 중심 사회였다. 유교를 중시하는 양반 가문 내에서는 남녀유별, 부부유별이 더욱 뚜렷했다. 조선의 유학자가 배우고 익혀서 실천해야 하는 유교적 생활 지침서인 <소학>은 여자에 대한 조선 양반들의 생각의 기본이 된 책이다. “남자와 여자는 옷 거는 횃대와 시렁을 함께 사용하지 아니”하고, “부인은 사람(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등이다.

조선의 양반집은 “이런 세계관과 가치관에 입각해” 건축됐다. 남자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자의 공간인 안채는 분리됐다. 일상생활에서도 남녀가 서로 말이나 물건을 주고받지 않았고, 부부가 밥상을 함께하거나 옷을 뒤섞어 걸어두는 일도 피했다. 여자는 아주 가까운 친척을 제외하고는 남자와 말도 나누지 못했다. 저자는 “조선 후기에 유교 문화가 점차 하층민에게도 확산되면서 하층민도 양반의 남녀차별을 흉내 냈다”며 “결국 남녀차별은 유교 문화의 전형적 특징으로 일반화되어갔다”고 설명한다.

조선 후기 양반이 아닌 상놈은 사회적 냉대와 멸시를 받았고, 많은 경제적 부담을 졌다. 그래서 18세기가 되면 모두가 가짜 족보를 만들어서 양반에 편입하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조리 양반이 되어버린다면 이는 곧 온 나라에 양반이 따로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라며 차라리 신분제를 개혁하자고 주장한다. 이 같은 장면들은 신분제는 없지만 특권층은 존재하는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역사란 과거를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 아니다”라며 “역사가 오늘날의 삶에 의미를 주지 않고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역사에 비추어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도 없는 장례식장에서 추도사를 읽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경향신문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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