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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농업국가와 교역국가, 남양사를 이해하는 두가지 축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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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베트남의 국보 제1호는 응옥루(Ngoc Lu) 청동북이다. 1893년 하노이 동남방의 응옥루 마을에서 제방 공사 중 우연히 출토된 이 청동북은 2백여 개 남아있는 동손(Dong Son) 청동북 중에서 가장 정교한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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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옥루 청동북의 표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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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제작으로 추정되는 이 청동북은 서북쪽 산악지대의 송다에서 발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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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손 청동북은 매우 특이한 청동기시대 유물이다. 기원전 6세기 이후 수백 년간 홍하(紅河) 유역에서 만들어진 청동북은 덩치가 크면서 (1미터 가까운 높이에 100킬로그램 가까운 무게까지 있다.) 무늬가 정교해서 경탄을 자아낸다.

만들 당시의 용도는 악기이자 제기(祭器)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후세에는 보물로 취급되어 중요한 교역 대상이 된 것 같다. 만들어진 곳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남양 곳곳에서 발견되어 온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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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손 청동북이 발견된 곳(붉은 색 점).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남양의 상고시대에 관해서는 고고학, 언어학 등 전문 연구서를 찾아 읽기가 벅차다. 그래서 개설서를 훑어보면서 눈에 띄는 항목을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본다. 개설서로는 피터 처치의 〈짧게 쓴 동남아 역사 A Short History of South-east Asia〉(제6판, 2017)와 크레이그 로커드의 〈세계사 속의 동남아 Southeast Asia in World History〉(2009)를 이용하고 있다.

둘 다 250쪽 전후의 얇은 책인데, 로커드의 책에 활용 가치가 크다. 처치의 책은 국가별로 서술되어 있고 ‘동남아’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없다. 로커드의 책은 확실한 그림은 아니라도 최신 연구성과를 활용해 넓은 시각을 세우려는 노력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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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Church, A Short History of South-east Asia. 남양사에 아직 관심을 집중하기 전에 친지에게 선물받은 이 책이 남양사 공부의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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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ig Lockard, Southeast Asia in World History. 옥스퍼드 출판부의 “세계사 속의 ~” 시리즈 중에서 가장 내용이 충실한 책의 하나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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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로 초기 문명을 구분하는 3분법은 19세기 초에 제안되어 고고학 연구의 뼈대 노릇을 했다. 20세기에 방사성탄소를 이용한 절대연대 측정 등 기술 발전에 따라 3분법의 역할이 줄어들고 유럽-중동 이외 지역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문제 제기도 나왔지만, 기술 수준을 나타내는 기본 지표로서 역할은 아직도 유효하다. 청동기보다 훨씬 높은 고열이 제작에 필요한 철기는 청동기의 다음 단계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청동기보다 견고하고 원료가 흔한 철기는 농기구에 많이 쓰이면서 농업생산량을 크게 발전시켰다. 청동기사회는 잉여생산력의 한계 때문에 정치조직의 확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청동기시대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도 특색이 다른 문화들이 전개되곤 했다.

기원전 10세기에서 1세기까지로 추정되는 홍하(紅河) 유역의 동손 문화는 고도로 발달한 청동기문화였다. 비슷한 시기에 남쪽에는 참파의 연원으로 추정되는 사후인(Sa Huynh) 문화가 펼쳐졌다. 사후인 문화는 교역이 활발했고 기원전 6세기경부터 철기를 사용한 흔적이 있다. 교역이 활발한 지역에 외부의 제철 기술이 먼저 들어온 것으로 이해된다.



당나라 승려가 전한 해상제국의 모습



경제면에서 남양사의 양대축은 농업 발전과 교역 확장이었다. 농업 발전의 중심은 벼농사에 있었다. 벼농사는 일찍 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 발전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관개식 논농사로 이뤄졌다. 논농사는 생산력의 획기적 향상을 통해 정치조직의 확장을 비롯한 전반적 문명 발전에 추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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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의 바오밥나무. 남양어를 쓰는 말레이인은 마다가스카르섬에도 벼농사를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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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바나우에의 다락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높은 수준 수리기술이 필요한 동남아 해양부의 다락논은 대륙부 큰 강 유역의 논농사보다 늦게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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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에서 논농사가 일찍 보급된 곳은 홍하-메콩-차오프라야-이라와디 등 큰 강의 중-상류 유역이었다. 하류의 삼각주지대는 배수의 어려움 때문에 근세에 이르러서야 곡창으로 개발된다. 그래서 농업 기반 고대국가는 대륙부의 내륙지방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빅터 리버먼이 〈기묘한 평행선〉에서 9-11세기에 나타난 파간, 앙코르, 다이비엣 등 농업국가들을 동남아 역사의 중심에 놓고 보는 까닭이다.

국가 형성의 계기는 교역 방면에서도 만들어졌다. 7-11세기에 수마트라섬을 중심으로 존재한 스리비자야 제국의 모습 일부가 당나라 구법승(求法僧) 의정(義淨, 635-713)의 기행문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内法傳)〉으로 중국에 전해졌다.

의정은 인도로 가는 길에 스리비자야에 들러 반년간 체류했고, 11년 후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8년간 체류했다. 가는 길에는 산스크리트어를 익히는 등 준비를 위한 체류였고, 돌아오는 길에는 구해 온 경전의 번역 작업을 위한 체류였다.

번역을 위한 체류가 왜 그렇게 길었을까? 떠오르는 의문이 있을 때 물어볼 만한 사람들이 그곳에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더구나 8년의 체류 중 지필묵을 구하러 한 차례 광저우에 다녀갔다는 대목을 보면, 불교국가 스리비자야에서 번역 작업을 위한 최상의 환경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흔적을 많이 남기지 않은 것은 해상국가의 운명일 것이다. 스리비자야의 실제 모습은 같은 시기 대륙부의 농업국가들처럼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의정이 귀국을 8년이나 늦출 만큼 좋은 작업 환경을 제공한 국가라면 당시의 존재감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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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렘방 부근의 수상가옥(1917년 촬영). 스리비자야 중심지의 유적이 워낙 안 남아있기 때문에 이런 수상가옥으로 수도가 이뤄진 것 아니었을까 추측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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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비자야의 판도(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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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트라섬의 무아로잠비 사원 유적. 스리비자야의 유적으로 추정은 되지만 확인은 되지 않고 있고, 앙코르와트 같은 대륙부의 불교 유적에 비하면 소박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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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독립을 위한 중국 쪽 배경



중국에서 교주(交州)로 불린 홍하 유역에는 관개농법의 선진기술이 중국으로부터 일찍 전파되었다. 5세기경에야 논농사가 산발적으로 시작된 다른 강 유역보다 초기 발전이 빨랐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중국이 놓아주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베트남이 독립국으로서 왕조시대에 접어든 데는 중화제국의 성격 변화와 관련된 측면이 있다. 당나라까지 인신(人身) 지배의 국가가 송나라부터 영토 지배의 국가로 바뀐 것이다. 문벌 아닌 과거제를 중심으로 관리를 등용하게 된 것이 대표적 변화였다.

송나라 태조가 천하 (재)통일을 앞두고 공신들을 모은 자리에서 집단 은퇴를 권한 일이 “한 잔 술에 군대 내놓기(杯酒釋兵)”란 일화로 전해진다. 공신들은 군벌이었다. 송나라가 군벌 연합을 넘어 보편적 (유가) 원리에 입각한 제국체제로 자리 잡는 장면을 보여주는 일화다.

한 무제의 남월 정벌(기원전 111) 이후 938년 응오쿠옌(Ngô Quyền 吳權)의 즉위까지 1천여 년간을 베트남의 ‘중국 지배시대’로 본다. 이 시기에 중국의 베트남 지배는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 주 소개한 시니엡(士燮, 137-226)이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시니엡은 교주에 6대째 자리 잡은 집안 출신이고 그 아버지는 일남(日南, 교주의 속군) 군수였다. 한나라의 관점에서는 변방 호족(豪族)이다. 시니엡이 초년에 상서랑(尙書郞)으로 출사한 것은 변방 호족 자제의 전형적 진로였고 그 아버지의 사후 교지(交趾) 군수로 임명된 것은 문벌의 계승이었다.

삼국시대의 중원 국가들이 교주 같은 변방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던 상황은 제갈량의 실속없는 남만(南蠻) 정벌로 알아볼 수 있다. 손권의 오나라는 시니엡의 우호적 태도에 만족했다. 시니엡과 같은 변방 실력자들은 최소한의 부담으로 중원 제국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자기 지역에 군림하는 데 중원 제국의 권위를 이용했다. 중원 제국의 힘이 비교적 강했던 시기가 당나라 때(618-907) 많았고, 당나라 멸망 후 베트남의 독립왕조 시대가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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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남만 정벌 약도. 지금의 윈난-구이저우 지역이 표적이었다. 그 남쪽의 동오 영역 끄트머리에 시니엡의 교주가 있었다.





리버먼의 “헌장 시대”가 끌리지 않는 이유



빅터 리버먼은 900-1350년의 시기를 “헌장 시대(Charter Era)”라고 부른다. 홍하 유역의 다이비엣, 이라와디 유역의 파간, 메콩-차오프라야 유역의 앙코르, 베트남 동남해안의 참파 등 최초의 영토국가들이 나타나면서 종교-정치-행정 등 여러 방면에서 ‘헌장’, 즉 보편적 원리의 지배가 자리 잡은 시대라는 것이다. 그는 이후의 역사도 헌장 지배의 쇠퇴와 회복이 반복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요컨대 동남아 (대륙부) 역사를 “헌장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리버먼의 책을 반도 안 읽은 내가 그 관점을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끌리지 않는 까닭을 설명할 수는 있겠다. 무엇보다, 영토국가 중심으로 그 지역 역사를 보는 시각이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내가 보는 남양사의 첫 번째 특성은 영토국가의 역할이 작았다는 데 있다. 큰 강 유역의 농업국가들이 인근의 교역국가들에 비해 영토국가의 성격을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교역국가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 사실을 생각하면 영토국가의 성격만으로 그 역사를 살피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대륙부의 ‘헌장 체제’를 보편적 현상으로 꾸미기 위한 무리한 재단도 마음에 걸린다. 참파는 농업국가보다 교역국가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륙부에 위치하고 인도 문화를 수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억지로 ‘헌장 체제’에 끼워 맞추는 데 걸리는 문제가 많다.

다이비엣의 경우도 파간, 앙코르와 발전의 궤적이 전혀 다르다. 리버먼이 중시하는 농업국가의 성격이 다이비엣에서는 수백 년 앞서서 갖춰져 있었다. 다이비엣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확보한 시점이 파간이나 앙코르가 농업국가의 성격을 갖춘 시점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헌장 시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농업 발전과 교역 확장이 남양사 전개의 양대축이었던 만큼 국가체제의 발전도 농업국가와 교역국가의 두 갈래로 펼쳐졌다. 교역국가는 농업국가에 비해 흔적을 적게 남겼을 뿐 아니라 농업 위주의 문명관 때문에 학술계의 주목을 덜 받아 왔다. 남양사의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교역국가의 모습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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