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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슬기로운 거실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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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아무튼, 레터] 거실생활자

조선일보

거실생활자 /인터넷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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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하는 순간에 거실을 빼앗길 수 있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여성이 많아진다. 거실에서 커피로 잠을 깨우고, 거실에서 밥을 먹거나 일을 하고, 저녁에는 거실에서 술을 마시고 잠까지 잔다. 하루가 그 장소에서 열리고 또 닫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거실생활자’라 부른다.

“방이 3개인데 남편은 안방을 쓰고, 아들과 딸에게 하나씩 줬어요. 저는 (막내인) 강아지도 있고 TV도 볼 수 있는 거실로 나왔습니다. 몰래 야식도 싹싹싹 먹고요, TV도 보고 넷플릭스 보고 리디북스도 보고…. 이런 게 해방 아닙니까? 다시는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거실을 끝까지 수성할 겁니다. 소파 자리에 일체형 침대를 놓는 건 어떨까요?”

어느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글이다. “거실 생활을 하는 분들의 고견을 부탁드린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거실생활자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댓글들이 꽤 빠른 속도로 붙었다. “어머, 저도 거실 생활 N년 차예요. 이제는 방에 절대 못 들어가죠” “비슷한 이유로 고민하다가 XX 그랑 소파를 샀어요. 서너 달 되었는데 너무 행복해요” “저도 거실 생활을 하는데 반갑구먼요. 좋은 정보는 킵을 해뒀다가 그걸 장만해야겠어요”….

하모(47)씨는 올 초부터 거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오랫동안 안방에서 자다가 마침내 거실로 나온 것이다. “남편에게 안방을 양보했더니 코 고는 소리가 안 들리고 정말이지 꿀잠을 잔다”고 했다. 그 말이 ‘거실 생활 홍보 대사’처럼 들렸다. 좋은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방 3개 중 하나는 드레스룸으로 용도를 바꿨다. 넓은 곳에서 자니까 답답하지 않고 시원하다고. 특히 부부 싸움을 한 뒤에는 거실생활자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고 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었다. 어느 날 손님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어떻게 하나? 그 질문에 거실생활자들은 준엄하게 답했다. “손님을 위한 꾸미기는 제대로 된 거실이 아닙니다. 가장 넓은 공간을 왜 거의 오지도 않을 그에게 양보하나요? 거실은 아침부터 밤까지 가족을 위한 공간이어야 합니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남겼다. “이 수기의 필자도, 이 수기 자체도 허구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인물은 우리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조건을 고려한다면 얼마든지 이 세상에 존재할뿐더러 그게 당연하다”로 시작되는 글이다. 그가 지금 한국에 살고 있다면 ‘거실생활자의 수기’를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돈규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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