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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불가피한 ‘양적완화’ 전성기… 화폐라는 특권의 진실과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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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엔저정책·금융위기 때 美 재정 지출 등

경기 부양 위한 통화 발행, 세계적 추세 돼

“정부부채 미래에 전가” 등 비판 목소리도

저자, 양적완화론 관점서 돈의 기능 옹호

돈의 권력/폴 시어드/이정훈 옮김/다산북스/2만5000원

일본 중앙은행은 21세기 초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린 자산버블 붕괴와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주요 선진국 가운데 처음으로 양적완화 정책을 도입했다. 이때 일본 중앙은행이 양적완화 정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세계 각국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봤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뇌관이 터지자,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를 비롯해 유럽 중앙은행, 잉글랜드은행 등 주요국 당국이 앞다퉈 양적완화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미 연준은 양적완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대규모 자산 매입’이라는 이름으로 전개했고, 다른 나라들 역시 통화량 확대와 재정지출 확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양적완화를 실시했다. 초기 양적완화를 선도했던 일본 역시 아베 신조 총리가 재집권하면서 일본 중앙은행과 손을 맞잡고 경기 부양을 위해서 ‘윤전기 아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대한 규모의 돈을 쏟아냈다.

세계일보

양적완화 전성시대를 맞아서 돈이 어떻게 해서 탄생했고, 어떻게 경제와 세상을 재구성하며 진화해왔으며, 암호화폐를 비롯해 그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조망한 책이 나왔다. 양적완화론의 주요한 내용과 논리를 엿볼 수 있다. 사진은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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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20년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하자, 미국과 일본, 영국 등 세계 각국은 또다시 양적완화 정책을 펼쳤다. 한국의 문재인정부 역시 사상 처음으로 재정을 적극 투입해 막대한 돈을 풀면서 위기에 대응하기도 했다.

양적완화 정책이 이어지면서 논란 역시 퍼져 갔다. 비판론자들은 무분별한 통화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도 있고 금융시장에 지나치게 개입해 시장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각국 정부는 이미 정책금리가 실효 하한선에 도달해 더 이상 인하할 수 있는 ‘금리 실탄’이 없다며 경제활동을 위해선 불가피하다며 정책을 멈추지 않았다.

이처럼 미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가 최근 위기가 닥칠 때마다 막대한 양의 돈을 찍어내고 돈을 풀어서 경기를 부양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세계적 규모에서 이 같은 대규모 양적완화는 이례적이다. 몇 번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세계경제 시스템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돈에 의한 세계의 재구성, 양적완화 전성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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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시어드/이정훈 옮김/다산북스/2만5000원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 중 하나인 S&P글로벌의 부회장인 저자는 책 ‘돈의 권력’에서 양적완화 전성시대를 맞아 돈이 어떻게 해서 탄생했고, 어떻게 경제와 세상을 재구성하며 진화해왔으며, 암호화폐를 비롯해 그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살펴본다. 그러면서 각국 정부는 위기 시에는 높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돈을 풀어서 경제부양의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양적완화론인 저자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정부가 돈을 찍어내 인프라나 복지에 투자할수록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 경제도 살아난다고 보는 현대통화이론(MMT)에 바탕을 두고 있다. MMT는 ‘악마의 경제이론’ 또는 ‘방구석 경제학’이라는 조롱을 받는 ‘경제계의 이단아’이지만, 많은 국가가 경제위기 때마다 양적완화 방식을 채택하면서 실효성의 일부가 증명되기도 했다는 평가다.

책은 제1부에서는 화폐가 어떻게 생겨나는지와 막대한 정부 부채에 대한 오해와 진실, 인플레이션 시대를 살펴본다. 이어서 2부에서는 양적완화란 무엇이고 세계는 왜 막대한 돈을 찍어내는지와 부의 번영과 불평등의 문제 등을 살펴보며, 마지막 3부에선 유로존의 국가부채 위기를 비롯해 위태로운 유로화의 미래와, 세계를 이어주는 국제화폐, 최근 화두로 떠오른 암호화폐의 미래를 살펴본다.

저자는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 경제 시스템의 작동 방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면서 그동안 돈과 경제에 관해 잘못 알고 있던 오해들을 제시한 뒤 이 오해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교정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돈은 단순하고 모호하지 않은 개념이라는 오해, 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앙은행이라는 오해, 금융위기 이후 대규모로 돈을 찍어냈다는 오해, 정부의 국가부채가 후손들에게 대물림된다는 오해 등등. 몇 번의 금융위기를 겪은 뒤 국가들의 부채는 더욱 많아졌고 정부의 막대한 부채에 사람들의 걱정이나 우려 또한 깊어졌다. 왜냐하면 국가부채는 언젠가 갚아야 할 돈이고 결국 우리의 자손, 미래세대가 그 부담을 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같은 생각은 오류라며 정부 부채를 둘러싼 대부분의 오해와 신화는 정부가 마치 가계와 기업처럼 기능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반박한다. 즉, 정부는 지출할 때 돈을 만들어내고 세금을 부과해 돈을 없앤다며 정부는 마음껏 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돈이 모자랄 수도 없고 그것을 되갚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정부의 부채는 그것을 보유한 사람들에게 자산이며, 미래 세대에겐 전혀 부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대신 정부가 너무 많은 구매력을 창출했는가, 정부의 적절한 규모와 역할은 무엇인가, 인플레이션을 조절하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고 있는가 등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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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지폐를 세는 손.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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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두로 떠오른 비트코인을 비롯해 암호화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 법정 화폐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도 오해라고 지적한다. 비트코인과 여타 암호화폐는 기존 화폐시스템과 완전히 분리돼 있지 않고 화폐의 세 가지 역할을 충족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혁신 사이클의 초기 단계에 있는 만큼 섣불리 예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암호화폐가 기존 법정화폐를 대체할 정도로 커지게 되면 기존 화폐 독점권을 쥔 중앙은행과 정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에 그 지위에 심각한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전망했다.

책은 돈의 기능과 역할을 과도하게 긍정하고 그 부정적인 효과나 신화화를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전례 없는 양적완화의 시대를 맞아 양적완화론의 주요 내용과 논리, 돈과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화폐의 미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먼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를 예측한다는 건 가장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돈은 여전히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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