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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선분양 그늘 낳은 한국 아파트 공급, 마포가 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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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희 기자(eday@pressian.com)]
아파트만큼 현대 한국을 잘 보여주는 상징은 없다.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대단지 체제, 외국의 개념과 전혀 다른 고급화, 급격한 도시화 역사의 징표, 부동산 투기의 온상, 완성되지도 않은 상품을 팔고부터 보는 괴상한 선분양 제도까지, 한국 아파트를 상징하는 여러 이미지와 제도는 현대 한국사의 압축처럼 여겨진다.

<한국주택 유전자>를 쓴 고 박철수 시립대 건축학부 교수의 유작 <마포주공아파트>(마티)는 한국 아파트 문화와 제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마포주공아파트의 출발과 영향을 정리한 역작이다.

마포주공아파트는 한국 최초의 대단지 아파트다. 1961년 10월 착공해 1962년 12월 1차 준공, 1964년 11월 30일 최종 완공됐고 1988년 재건축이 확정돼 1991년 3월 철거됐다. 철거된 자리에는 한국 최초의 재건축 아파트인 마포삼성아파트가 들어서 오늘에 이른다.

착공 시기로 익히 짐작 가능하듯, 마포주공아파트는 5.16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민심을 다독이고자 밀어붙인 국가프로젝트다.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2월 17일까지 2년 6개월가량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립원호원, 새나라자동차 공장, 워커힐 호텔 등의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일반 시민 삶과 관계한 프로젝트가 마포주공아파트 1단계 준공이었다.

프로젝트를 밀어붙인 건 쿠데타 세력인 장동운 중령이었다. 육군사관학교 8기인 그는 1962년 대한주택공사 초대 총재가 된 후 눈여겨본 마포형무소 채소밭 부지를 확보해 시범아파트를 짓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쿠데타 세력이 제시하는 '생활 혁명'의 상징으로 홍보하고자 했다. 당시까지도 장독대와 아궁이가 일반적 주거형태였던 한국 주택 형태에서 대단지 아파트는 일견 무모해보였다. 특기할 건, 당시 한국에서도 아파트는 "주로 영세민이 사는 '빈민굴' 이미지"였다는 점이다. 외국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이미지였다.

쿠데타 세력이 홍보하는 주택이 빈민굴이 되어서는 곤란했다. 미래 한국의 삶을 선도하는 이미지여야만 했다. 이에 마포주공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중앙난방형 10층 높이의 11개동 1158세대 대단지 아파트로 최초 기획됐다.

주택 규모도 당시 한국 상황과 맞지 않았다. 공급 주택 평형은 9평, 12평, 15평이었다. 핵가족과 신혼부부 정도에 맞춘 구상이다. 당시만 해도 대가족 세대가 일반적이었던 한국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부터 마포주공아파트는 현실적 수요에 맞춤한 것이 아닌, '현대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을 국민에게 학습시키고자하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선전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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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주공아파트 항공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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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장 신화가 여기서도 그려진다. 이같은 고층 주택-대단지 주택은 선례가 없었다. 당시까지 대한주택영단(대한주택공사 전신)이 한국에 공급한 아파트는 기껏 2층 조적조의 이태원 외인아파트(1960년)와 3층 높이의 단일동 공영아파트, 콘크리트블록에 목조 지붕틀을 채택한 2개 동 3층 도화동 소형아파트(1963년) 정도였다. 시대상을 고려하면 장동운의 10층 대단지 아파트 공급은 망상에 가까웠다.

건축학적으로도 국내에 이를 담당할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다.

"엄덕문 당시 주택영단 건설이사 겸 건축부장은 '영단 수준으로는 설계 못 한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엄덕문은 와세다대학교 부설 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훗날 세종문화회관(1978), 과천정부종합청사(1982) 등을 설계하며 당대 최고의 건축가 가운데 한 명으로 성장하는데, 그런 그에게도 10층 아파트는 무모한 계획이었다. 군사 정부의 서슬에 기가 눌려 죽을 상황이었지만 못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 10층 높이는 아니었지만, 외국이늗ㄹ을 위한 주택인 한남동 유엔빌리지의 외인아파트처럼 다양한 설비를 갖춘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역시 중앙산업이 설계하고 당시 한국에서 가장 다양한 경험을 지닌 육군공병단이 시공을 맡아 완공 후 이를 대한주택영단에 인계한 것이었다. 규모를 떠나 당시 영단의 설계와 시공 경험은 일천했다."

실력뿐 아니라 능력도 문제였다. 1963년 당시 한국 정부 한해 예산은 768억 원이었다. 장동운의 기억에 따르면 마포주공아파트 단지 건설을 위해 일본인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귀속자금은 당시 기준 5억 원 정도였다. 단일 아파트 단지 건설에 국가 예산의 153분의 1을 투입하기로 한 결정이다. 올해 정부 예산 656조 원으로 비교하자면 국가 예산 4조3000억 원을 서민 주거형이 아닌 일반인 도시민을 위한 아파트 단지 개발에 투입한 셈이다.

다만 실제 결과물은 목표와 달랐다. 엘리베이터는 사라졌고 10층 높이는 6층으로 낮아졌다. 최종 공급 세대는 10개동 642가구로 줄어들었다.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지만 박철수 교수는 무엇보다 미국경제협조처(USIM)의 반대를 중요한 원인으로 꼽았다. 당시 USIM은 아파트보다 난민구호주택을 더 많이 지을 것을 강력하게 원했다. USIM이 1961년 11월 15일 대한주택영단에 보낸 설계협의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포주공아파트 최초설계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하다. 서슬 퍼렇던 군부 독재 아래서 당시 언론도 에너지 부족을 이유로 중앙난방과 엘리베이터 설치를 강력히 반대했다. 서울시마저도 서울에도 마실 물이 귀한데 무슨 수세식 화장실이냐며 이를 비판했다.

이 같은 '난관'을 뚫고 기어이 최초의 '케이모던'이 탄생했다(케이모던은 출판사 마티가 <마포주공아파트>를 시작으로 선보이는 새 시리즈다. 한국이 만든 '현대성'에 초점을 맞춰 이 같은 발견이 어떻게 오늘날 한국인을 만들었는가를 조명한다.).

케이모던의 발견 혹은 발명은 단기간 압축 성장의 서사 아래 무수한 신화를 현대사에 남겼다. 그리고 이는 현대 한국인의 DNA에 일부로 남았다. 다걸기에 나서는 모험주의,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대식 밀어붙이기는 이후 포항제철 신화, 현대차 신화 등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 무수히 반복됐다. 마포주공아파트는 한국 군사독재형 개발 신화에서도 초창기에 해당하는 셈이다. 장기간 신화는 미화되기만 하며 세간의 기억을 형성했으나, 마포주공아파트 신화는 뚜렷한 그늘을 남겼다.

마포주공아파트가 남긴 무엇보다 뚜렷한 그늘은 책 7부 '임대에서 분양으로, 한국 주택 공급의 운명'에 명확히 적시돼 있다. 최초 마포주공아파트 공급 당시 1차 준공분인 Y자형 아파트 450호는 모두 임대용 주택이었다. 2차 준공분인 一자형 주거동 4동 144호가 분양분이었다. 그런데 1967년 기존 Y형 임대아파트 450호 전체가 분양으로 전환됐다.

이유는 대한주택공사의 자금난이었다. 이미 임대계약을 맺고 입주한 이들을 대상으로 분양이 실시됐다. 한국 아파트 공급사의 중대한 분기점이다. 이 소식을 다룬 1967년 4월 16일 <조선일보> 기사는 사태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마포의 임대아파트가 머지않아 분양이 된다 한다. 이로써 마포아파트는 임대하는 아파트가 아닌 일반 분양아파트가 된다. (...) 안타깝기만 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중요시하는 것은 마포아파트의 출발 당초 계획이 변질되어 '임대하는 아파트'란 형식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는 데 있고, 우리의 현실에서 공영임대주택이 성립할 수 없다는 개념을 남기게 되는 결과를 자아내게 하였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

책은 그 부작용을 더 깊이 진단했다. "이후 대한주택공사의 주택 공급 정책은 철저히 분양, 그것도 선분양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민간 사업자들의 주택 건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예산이 부족한 1960년대에 채택한 이 방식은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고착되어버렸다. (...) 임대에서 분양으로 전환되면서 불거진 갈등은 결국 정부가 공급하는 주택의 법적 규정과 성격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 이후 임대아파트는 분양 아파트단지의 틈바구니 속에서 저소득층의 남루한 집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오늘날 한국 아파트 공급의 최대 문제점 중 하나가 선분양이다. 지어지지도 않은 아파트를 분양부터 하니, 완성 후 입주한 이의 집에서 인부의 대변이 나오고, 부실 공사로 인해 빗물이 줄줄 새고, 약속한 도로 확장 공사가 이뤄지지 않아 당국 허가가 나오지도 않는 어이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상품을 보지도 못하고 가짜 상품(모델하우스)만 믿고 분양신청을 해야 하는, 집주인이 철저한 을이 되는 기형적 구조의 출발점 중 하나가 뿌리를 깊이 거슬러 올라가면 마포주공아파트인 셈이다. 장기간 시민사회단체가 후분양제로의 전환을 외쳤으나 이는 오랜 시간 '빨갱이'의 목소리로 외면됐다.

마포주공아파트는 군부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67년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 대단지 고층아파트 공급은 주택공급책의 핵심이 됐다. 여의도에, 이촌에, 기타 숱한 지역에 마포주공아파트의 클론인 시범아파트들이 공급됐다. 수요가 없는 곳에서 이뤄진 공급이 '미래 한국 도시 생활'의 이정표가 되어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급격한 성장 아래 상시 부족했던 주택 공급의 탁월한 대안이 돼 한국 도시를 오늘처럼 아파트가 덮는 그림의 원형이 됐다.

변화는 극적인 수준으로 나타났다. 1970년 전체 주택 중 단독주택 비중은 95.3퍼센트였고 아파트는 0.77퍼센트에 불고했다. 2005년 아파트 비중은 처음으로 절반을 넘겼(52.7퍼센트)고, 2020년에는 62.95퍼센트에 이르렀다. 반면 단독주택은 21퍼센트로 급감했다. 단 50년 만에 국민 다수가 사는 주택 유형이 이처럼 급격히 변화한 사례를 한국 외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마포주공아파트가 그 뿌리이자 빛, 그림자였다. 대단지 아파트 공급 경험이 성공하자, 군부의 서울 대개조는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서초, 영동, 잠실에 대단지 아파트 공급이 착착 이뤄졌다. 아파트는 곧 모던한 삶, 새로운 삶의 기준이 됐다. 국가가 사들인 땅에 공급한 아파트 입주로 대박을 치는 부동산 대박 신화가 급격한 도시화의 부산물로 한국 전역에 확산해 오늘에 이르렀다. 마포주공아파트는 곧 모던케이, 케이하우징의 뿌리이자, 표준이자, 한국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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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주공아파트>(박철수 지음) ⓒ마티



[이대희 기자(eday@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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