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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17]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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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막이 오르고 한 여자가 서 있다

무대의 빛은 여자를 비추고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빛을 바라보면서 여자는 드디어 입을 여는 것일까

서서히 천천히 희미하게 몸이 너울처럼 흔들렸다

모든 관객의 눈은 그 여자에게 쏠려 있다

그 여자의 생 어디쯤일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비가 되었다가 눈이 되었다가

갑자기 울부짖으며 흐느끼며 온몸이 거센 파도가 된다

침묵과 울부짖음 그리고 느린 여자의 형상뿐

막이 내렸다

다 알아들었는데 사실 대사는 한마디도 없었다.

-신달자(1943~)

조선일보

그래픽=김성규


‘나’라는 존재를 인생이라는 무대에 선 배우에 비유하곤 한다. 시인도 시 ‘오늘의 공연 1′에서 “내일의 공연이 숙제로 남는 것이지요/ (……)/ 나는 일인극 무명 배우입니다”라고 썼다. 무명 배우라고 겸손하게 적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제각각 일인극 주연 배우이다. 각본도 쓰고, 분장도 연기도 스스로 한다. 물론 배우를 돕는 조력자가 없지 않다. 결단코 홀로 살 수 없는 까닭에.

한 여자가 공연 무대에 섰다. 물너울 같은 동작이 있고, 공연은 막을 이어가며 펼쳐진다. 계절과 세월이 흐르며 맑은 날과 강우의 날과 강설의 날이 거듭 지나가듯이. 그이는 흑흑 소리를 내 울기도 하면서 감정 변화를 격정적으로 표현한다. 이윽고 무대는 막을 내리고, 대사가 없는 무언극과도 같았지만 관람객들은 공연 내용을 어림잡아 헤아린다. 그이가 실연(實演)한 것이 내 삶의 서사와 별반 차이가 없었으므로. 생(生)의 공연이었으므로. 시인이 산문에 썼듯이 우리는 저마다 “늘 서툴고 뒤틀리고 손에 든 것을 놓치고 넘어지고 혼자 감동하고 벌벌 떨고 변변치 못한 순간과 영원이 고여 있는 삶”을 꿋꿋이 살아가고 있으므로.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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