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권력이 떠나간 이후… 국민과 어떤 관계 다시 맺을까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33) ‘새로운 의미 기다리는 권력의 집’ 청와대

원래는 경복궁 후원… 여러 전각으로 조성

일제 총독 관저 옮겨오며 푸른 기와 얹혀

‘높은 자리에 청와’ 차별화 통해 권력 향유

노태우 정부 시절 본관·관저·춘추관 신축

청와는 그대로… 새 상징성 없이 과거 회귀

우리가 만든 건축은 사회 시스템의 산물

대통령실 이전 후 남은 청와대 활용 과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이 말에서 ‘자리’는 부장, 상무, 대표이사와 같은 조직의 직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높고 낮은, 시선이 모이고 흩어지는 공간의 특성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전자는 사람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후자는 사람이 지닌 권력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세계일보

해방 전부터 청와대는 푸른 기와로 상징되는 최고 권력의 자리이자 권력의 취약점을 숨기는 장소였다.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으로 더 이상 권력의 집이 아닌 청와대는 이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는 비록 그 자리가 국민이 선출하는 5년 단임 계약직이라 하더라도 대통령이다. 어쩌면 직(職)의 한시성을 전제로 하기에 그 엄청난 권한을 위임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국민의 직접선거가 됐든 체육관에서 몇 명이 모여 시행한 선거가 됐든 일단 최고 권력에 오른 사람은 그 자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권력이 지닌 취약점은 가리려고 한다. 그래서 권력자는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만 담은 건축물 또는 구조물을 시민들이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 이를 통해 시민들의 생각과 태도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런 역할을 가장 많이 부여받은 곳은 권력이 머물렀던 청와대였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의 집이 ‘청와대’로 불리기 시작한 건 제4대 윤보선 대통령 때였다. 당시 푸른색 기와를 새로 설치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집의 지붕은 일제가 조선 총독 관저로 준공할 당시부터 푸르렀다. 일제는 경복궁에 있던 총독 관저를 옮겨오면서 전라북도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 본당인 십일전의 청와(靑瓦)를 가져와 지붕에 얹혔다. 그들은 식민지 백성이 사는 곳보다 높은 자리에 푸른 지붕이라는 차별화를 통해 권력을 드러내고 향유하고자 했다.

총독 관저가 옮겨오기 전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 후원이었다. 후원에는 문과 과거 시험을 시행했던 융문당(隆文堂)과 활쏘기 시험이나 무예 시범을 보였던 융무당(隆武堂)이 있었다. 그리고 임금이 쉬었던 오운각(五雲閣)을 비롯한 여러 전각으로 이루어진 ‘경무대(景武臺)’도 조성돼 있었다. 경무대는 1920년대에 훼철됐는데 대부분 일본 사찰 건물로 옮겨 사용됐다.

해방 후 총독 관저는 미군정청 존 하지 군정장관의 관저로 쓰였다. 그리고 3년 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경무대’라는 터의 이름을 붙인 대통령의 공간이 되었다. 건물을 사용해 온 사람들과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조합이었다. 심지어 일제의 최고 권력자였던 총독이 머물던 집을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이 사용하는 상황은 식민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다만 ‘경무대’라는 이름이 ‘광화문’이나 ‘근정전’과 같이 조선 왕조의 통치 철학을 담고 있지 않았음에도 이승만 정부는 이를 통해 자신들이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1층 집무실, 2층 관저로 구성된 청와대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상춘재, 영빈관이 신축되면서 청와대도 증축되었다. 흥미로운 건 과거 황제가 황색을 사용했고 청색보다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청와대를 ‘황와대’로 바꾸자는 어처구니없는 의견이 당시 제안됐었다고 한다(‘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청와대, 그 영욕의 900년사’, 조선일보, 2022년 3월29일). 대통령과 왕을 구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다.

1991년에는 노태우 정부가 “우리나라의 위상과 민주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밝고 진취적인 청와대”를 조성하겠다는 목적으로 본관, 관저, 춘추관을 신축했다. ‘보통 사람’을 표방하며 국민의 직접선거로 당선되었지만 그럼에도 12·12군사반란의 주역이었기에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쉽게 감이 오지는 않는다. 다만 노태우 정부가 내세운 “밝고 진취적인 청와대”는 총독 관저에 올려져 있던 ‘청와’와 '콘크리트 한옥’이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말한 목적에 부합한 대통령실의 새로운 상징을 찾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했다. 심지어 이후 불거진 청와대 집무실의 기능적인 문제와 이로 인한 대통령과 참모들 간의 소통 부재는 이때 지은 본관에서부터 시작됐다.

세계일보

‘청와대’라는 이름처럼 청와가 올려진 지붕의 중첩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이전하겠다는 공약을 처음 내건 대통령은 김영삼이었다. 그는 후보 시절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집무하겠다는 공약을 제안했다. 김영삼 정부 입장에서는 이전 군사 정권과는 다른 ‘문민정부’라는 가치를 자신이 일하는 자리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옛 총독 관저를 철거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호와 비용 등의 문제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무산됐고 주변 도로와 인왕산 출입을 허용하는 정도에서 청와대를 개방했다.

김영삼 대통령 이후 ‘청와대 탈출’은 역대 대통령 후보들의 단골 공약이 되었다. 하지만 공약을 이행하려 할 때마다 ‘경호와 비용’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청와대 탈출을 내세웠던 이들의 대안은 정부서울청사였는데, 결국 경호와 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대안을 바꿔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부서울청사가 아닌 용산 국방부 청사를 이전지로 선택하며 경호 문제를 풀어냈다. 보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국방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쓰던 건물인데 경호가 문제 될 일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군인들이 쓰던 건물이 대한민국의 국격을 상징하는 건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의 대통령실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청와대 이전을 주장해 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인용했던 문구가 있다. 바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영국 총리로 취임한 윈스턴 처칠이 했다고 알려진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이후 건축은 우리를 만든다”이다. 이 말은 건축과 인간의 상호 관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건축은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건축은 사회 시스템의 산물 중 하나일 뿐이다. 결국 우리를 만드는 건 건축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 시스템이다.

처칠의 말은 대통령실을 이전한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남겨진 청와대를 활용하는 우리의 방안에도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대통령실만큼이나 남겨진 청와대도 우리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3년 업무보고에서 문체부는 청와대를 “한국의 베르사유 궁전”처럼 프리미엄 전시 공간으로 꾸미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개방 첫해에 비해 관람객은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태다. 건축의 속성 중 하나는 건축이 두둔하는 주장이 바로 비판의 대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더 이상 권력의 집이 아닌 청와대에 우리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청와대가 온전히 국민의 공간이 된다”라는 옹호도 곧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