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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대행천국 일본… 부모 간병·장례도 대신해준다 [방구석 도쿄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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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방구석 도쿄통신’,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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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족 대행 서비스 제공 업체 LMN에 지난달 100건이 넘는 의뢰가 접수됐다. 가족 대행이란 노쇠한 부모의 입원과 간병, 장례 절차까지 대신 밟아주는 서비스를 말한다./FNN(후지뉴스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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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하객부터 강아지 산책, 퇴사, 이별까지… 일본에는 일상에서 접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돈을 받고 대신해주는 ‘대행 서비스’가 판칩니다. 도쿄의 한 대행업체 웹사이트엔 가격별로 무려 17종류의 서비스가 안내돼 있죠. ‘직장 상사나 여자·남자친구 부모님에게 무언가 잘못했을 때, 사과 대행(5000엔·약 4만원부터)’ ‘야간 긴급 이사 대행(1만엔·약 9만원부터)’ ‘소음·악취 등 이웃과의 트러블 해소 대행(3만엔·약 27만원부터)’ 등 이색 서비스들이 눈에 띄네요.

이 가운데 최근엔 노쇠한 부모의 입원과 간병, 장례 절차까지 대신 밟아주는 ‘가족 대행 서비스’까지 유행해 화제입니다. 아베마타임스 등 현지 언론은 최근 일본 가족 대행 서비스 제공 업체인 ‘LMN(Life·Medical·Nursing, 생활·의료·간병)’에 지난 3월 100건이 넘는 의뢰가 접수됐다고 보도했습니다. 2022년까지 40건 안팎이던 월별 의뢰 수가 지난해 중순부터 60건 이상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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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족 대행 서비스 제공 업체 'LMN'이 2021~2024년 접수한 의뢰 건수 추이. 지난 3월 100건을 웃돌았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지난 1월에는 일본의 한 공영주택에 거주하던 70대 독거노인이 건강 악화로 입원하는 일이 있었는데, 병원 측 연락을 받은 아들이 “아버지를 돌보기 싫다”며 LMN에 주택 퇴거와 간병 시설 입소, 장례 절차 등을 의뢰해 왔다고 합니다.

LMN이 제공 중인 가족 대행 서비스 등록 비용은 44만엔(약 400만원)으로, 입원과 간병 시설 입소 등 행정 절차를 대신 수속해주는 일을 기본적으로 맡습니다. 이 밖에도 고령자를 정기적으로 찾아 밥을 먹으며 말동무가 되거나, 묫자리를 알아보고 사후 관리까지 맡는 등 ‘생활 지원’은 1회 4시간에 1만1000엔씩이 추가로 부가됩니다.

예컨대 80대 부모의 입원과 간병, 자택 정리, 장례와 상속 절차를 의뢰하고 5년간 월 1회의 생활 지원까지 신청하면 이용비는 대략 100만엔이 된다고 합니다. 요양시설 입주비용은 별도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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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족 대행 서비스 제공 업체 LMN의 상담 사무소/PR타임스


일본에는 가정법원이 치매·장애 등에 의해 인지 능력이 저하됐다고 판단되는 이의 재산 관리를 대신 맡도록 지정하는 ‘성년 후견인’ 제도가 있지만, LMN의 가족 대행 서비스는 병원 등 의료시설에 직접 방문해 회원을 살피고, 외출이 어려우면 부동산 등 사적인 행정 절차도 대신 밟아준단 점에서 보다 폭넓은 역할을 맡습니다.

LMN 대표이사 엔도 히데키씨는 2016년 7월 가족 대행 서비스를 개시했는데요. 당초 그는 과거 편찮은 부모를 간병했을 때 힘들었던 기억을 토대로 사업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이에 초기 서비스 취지는 ‘고령자 지원’에 맞춰져 있었죠. 남은 가족이 없거나, 자녀가 직장 생활로 바쁜 노인이 직접 의뢰할 수 있게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엔 전체 의뢰의 80%가 ‘부모를 돌보기 싫다’는 자녀에 의해 접수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되려 ‘(자녀에게) 버려질 것 같다’며 스스로 의뢰한 노인도 있었다고 합니다. 가족과의 연락이 아예 끊긴 고령자의 경우엔 병원 측이 직접 대행사를 소개해주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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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족 대행 서비스 제공 업체 LMN의 홍보 사진/L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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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마타임스 등은 부모의 간병과 장례 절차를 대행사에 의뢰하는 자녀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를 당했던 경우가 많다고 전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실상 오랜 기간 절연(絕緣) 관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데요. 일본에선 지난 3월 과거 어머니에게 받은 학대를 고백하고, 그와의 절연을 공개적으로 전한 수필 ‘어머니를 버리다(母を捨てる)’가 출간돼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야마다 마사히로 도쿄 주오대(中央大) 가족사회학 교수는 “자녀가 성인이 되면 동등한 관계로 지내는 서양과 달리, 가족주의가 강한 일본인들은 언제까지나 부모의 존재를 신경 써야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러한 ‘일본적인’ 가치관에 짓눌려온 현대인들이 세상의 비난을 각오하고라도 ‘가족을 버린다’는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지 매체들은 가족 대행 서비스 이용률이 일본의 ‘초고령화’에 따라 계속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 중입니다. 지난달 발표된 인구 추계에 따르면, 일본의 75세 이상 인구는 약 2007만8000명으로 전체 인구 중 비율이 16.1%였습니다.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죠. 65세 이상 인구 비율도 29.1%로 사상 가장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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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가 보이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전경/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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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서른여섯 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대행 천국’ 일본에서 최근 유행하는 가족 대행 서비스에 대해 소개해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도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33~34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아이스크림 먹으려 日고교생들이 벌인일… “어른보다 낫네” 말나온 이유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4/10/WVX3YDCJGJCMVNTX7T2G4YON7Q/

“가격 올리느니 문 닫겠다”… 매일 아침 줄서던 빵집의 사연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4/17/C3W644XBTZGTBDUD6EKUJYRS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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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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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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