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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원혜영 “연명 치료·유산문제 미리 매듭 지어야 ‘웰다잉’ 가능하죠” [세상을 보는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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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은퇴 선언 뒤 ‘인생 2막’ 연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

초고령화 시대… 죽음 보는 시선 달라져

‘행복한 죽음 스스로 정하는’ 준비 필요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연 2조원 쓰는 韓

고통만 가중… 적극적 선택지 주어져야

死 언급 꺼리는 문화 탓 0.5%만 ‘유언장’

삶 정리하는 것… 재산 떠나 반드시 남겨야

세계이슈인 존엄사, 심도깊게 논의할 때

‘웰 다잉(well dying)’. 품위 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표준 영어가 아닌 콩글리시이지만 죽음조차도 행복하게 승화시키는 긍정적 측면을 부각한 단어다. 죽음도 삶의 중요한 일부분이라는 반어적 의미가 담겼다. 5선 국회의원과 부천시장을 역임한 원혜영(74)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는 “초고령사회를 맞아 행복한 죽음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자기 결정권’을 통한 아름다운 죽음은 21세기 어젠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후원요청 과정에서 죽음을 언급하다 보니 처음에는 거부감을 갖는 사람도 있었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죽음은 결코 회피한다고 해법이 나오는 게 아니다”라고도 했다. 2019년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 웰다잉 운동 전도사로 변신해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원 대표를 지난 25일 서울 서대문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세계일보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가 지난 4월 25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건 21세기 어젠다”라며 “1000만 고령자 사회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와 상속 분쟁을 줄이려면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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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다잉 운동을 정확히 설명해 달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유언장을 미리 써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한편 재산상속에 따른 분쟁도 줄이고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자는 것이다. 연명치료는 병원이, 장례는 상업주의가 만연한 장의사가 맡는다. 유산은 분쟁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법원이 개입하게 된다. 연명의료를 중단하면 의료비가 줄고 작은 장례식은 가계에도 보탬이 된다.”

―어떤 일이 계기가 됐나.

“2008년 세브란스병원 ‘김할머니 사건’으로 존엄사 논쟁에 불이 붙었다. 할머니 가족이 연명치료를 거부했고 대법원도 헌법에 따른 행복추구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법적 미비에 따른 처벌을 이유로 이행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유사한 일이 발생해 논란은 반복됐다. 결국 각계에서 호스피스 완화 운동이 일어났고, 동료 의원들과 함께 연명의료결정법(2016년)을 제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사람이 200만명이 넘었다.”

―법 제정 이후 달라진 게 있나.

“죽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뀐 게 큰 변화다. 웰다잉 문화의 핵심은 초고령사회를 맞아 1000만명이 넘는 고령층에 주목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두 축인 생명과 재산문제는 언제, 어떤 형태로든 명확히 매듭지어주는 게 맞다. 무기력하게 체념하고 살다가 의식이 없는 상황에 처하기 전에 스스로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거 아닌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과도한 장례비에 바가지를 쓰거나, 갑자기 쓰러졌을 때 후견인 선정을 놓고도 분란이 일어난다. 재산분배는 더 큰 분쟁을 가져온다. 그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다.”

―현행 법의 문제는 없나.

“당시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명을 중시하는 종교계 반대 등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해와 설득을 거치면서 연명의료중단 범위나 시기가 제한된 것은 아쉽다. 8년간 시행하는 과정에서 큰 우려는 사라졌지만 현실적 제약은 여전했다. 단적인 예가 인공호흡기와 음식물 섭취다. 호흡이나 물, 영양섭취는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다. 가장 먼저 영양섭취 장애가 오고 호흡은 마지막 단계다. 현행법으로는 인공호흡기를 떼는 건 허용되지만 음식물을 끊어서는 안 된다. 모순이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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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 남기기 운동도 하는 건가.

“그렇다. 나 역시도 매년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삶을 되돌아보곤 한다.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은 많고 적음을 떠나 스스로 정리하는 게 옳다. 웰다잉문화운동본부 홈페이지에 유언 무료 상담센터를 연 이유다. 유언장은 반드시 필요하다. 선진국은 이미 유언장 문화가 널리 퍼져 있지만 우리나라는 0.5%에 불과하다. 물려줄 재산이 많고 적은 게 이유라기보다는 아직도 살아 있을 때 죽음을 언급하기를 꺼리는 문화와 사회적 인식 탓이 크다.”

―헌법재판소가 형제자매에게 유산상속 강제하는 유류분에 대한 ‘위헌·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웰다잉에서 중요한 문제다. 사망자 의사와 상관없이 자녀에게 법정상속분의 2분의 1을 줘야 한다. 80∼90세가 넘어 세상을 떠나는 추세에서 자식도 이미 은퇴한 노년층이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47년 만에 ‘위헌’결정이 내려진 건 늦은 감이 있다. 자식이라고 의무적으로 주는 건 맞지 않다. 사회적 생산성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자식보다는 손자·손녀에게 주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국회가 후속입법을 서둘러야 하나.

“그렇다. 본인의 의사결정이 배제된 순간부터 유산분배를 놓고 다툼과 분쟁이 급증한다. 상속재판 건수가 이혼재판을 앞지른 지 오래다. 대부분이 1억원 이하 소송물 가액이라는 점에서 죽음이 가족간의 불화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연간 상속분쟁이 5만건이 훌쩍 넘는 상황에서 유언장(사전연명의료의향서 포함)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스스로 생명과 재산 두 가지를 결정하는 것만이 가족들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아름다운 이별을 맞을 수 있다.”

―웰다잉으로 사회적 비용도 줄이나.

“죽음을 돈으로 따지는 게 조심스럽지만 현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환자가 평생 쓰는 의료비 가운데 절반이 생의 마지막 1년에 들어간다. 심지어 그 비용의 절반이 연명치료 마지막 한 달에 쓰인다. 2009년 500만원이던 부담이 2019년 1500만원으로 세배 뛰었다. 또 5년이 지났으니 2000만원을 넘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살려 달라’ ‘할 수 있는 건 다해 달라’는 맹목적 감정보다는 이성적 판단이 필요하다. 2020년부터 연간 사망자가 30만명을 넘으면서 출생자를 앞섰다. 10만명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했다고 가정해도 러프하게 2조원이 넘는다.”

―2022년 국내 최초로 국회에서 ‘조력존엄사법’이 발의됐다.

“엄밀히 말하면 산소호흡기 같은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소극적’ 방식과는 다르다. 극심한 고통을 겪는 말기환자에게 의사가 약물 등을 제공해 스스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적극적’ 선택지를 제공하자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의사조력사망을 의미한다. 생명에 관한 문제라 섣불리 접근해서는 안 되지만 무조건 배제할 일은 아니다. 미국 오리건주가 1997년 세계 최초로 존엄사를 허용하는 주법을 만든 이후 2001년부터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서도 합법화됐다. 존엄사법이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하는 이유를 살펴봐야 한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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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정부의 2차 호스피스, 연명의료종합계획을 평가하자면.

“건강할 때 작성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달리 정부가 추진하는 건 엄밀히 말해 ‘연명의료계획서’다. 말기와 임종기 구분은 비전문인·비의료인이 판단하기 쉽지 않다. 지금은 임종기에만 연명치료를 중단·유보할 수 있다. 임종기는 회생가능성이 없고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해 사망이 임박한 상태로 말기와 개념 구분이 쉽지 않다. 연명의료 중단 이행시기를 앞당겨 ‘벼락치기’ 존엄사를 막자는 건 바람직한 방향이다.”

―‘원정 존엄사’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오죽하면 죽는 것도 돈 있는 사람만 가능하냐는 말까지 나온다. 프랑스의 유명배우 알랭 드롱이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선언했다. 2022년에는 프랑스의 영화거장 장 뤼크 고다르 감독도 안락사로 영면했다. 프랑스에서 안락사는 여전히 불법이다. 결국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도 본격적인 안락사 허용에 대한 국민 의견 수렴에 나섰다. 올해 안에 국가 차원의 방침이 결정될 것이다. 미국은 존엄사를 허용하는 주가 10곳을 넘었고, 캐나다·호주도 1∼2개주에서 국가 전체로 확대됐다. 자기결정권이나 개인의 자유 의지를 중시하는 서양권 문화라지만 몇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은 시대적 흐름인가.

“생명에 관한 문제이자 낯선 개념이라 심도 있고 깊이 있게 다뤄져야 한다. 다만 이미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존엄사(안락사)는 21세기 어젠다가 된 지 오래다. 우리 사회도 이런 도도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늘이 준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만 지속적인 고통을 감수하면서 무의미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건 본인이나 가족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본인의 ‘자기 결정권’이 웰다잉 문제의 핵심이다.”

―법이 오히려 삶을 쉽게 포기하도록 부추기는 건 아닌가.

“일반적인 개념으로 접근하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의료 차원에서 보면 다르다. 극심한 고통이 수반되고 회복 가능성이 없는데 굳이 무의미한 생명을 유지하는 게 옳은가 되묻고 싶다. 어찌 보면 의식이 꺼져가는 상황에서 준비된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준비작업이자 삶의 소중한 일부분이다.”

김기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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