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6 (목)

[목멱칼럼]2000명,69시간…실패 부른 두 숫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권순우 한국자영업연구원장

이데일리

[권순우 한국자영업연구원장] 4.10 총선이 여당의 참패로 끝났다. 이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2000과 69이라는 두 숫자에서 해석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두 숫자는 현 정부가 추진한 의료개혁과 노동개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숫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과 ‘주 69시간 근로’가 그것이다.

의대 정원 증원은 정책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잘못된 것은 의대 정원 이슈가 의료개혁의 본질이 아니라는데 있다. 의료개혁의 본질은 필수의료 분야가 의사들에게 외면당하고 비필수의료 분야로만 몰려들고 있는 현상을 해소하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의사 노동시장이 최고의 인적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국가 인적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현상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의사 노동시장 구조와 건강보험제도 등 관련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사 수 증원이 필요하다면 하나의 정책 수단으로 추진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의료개혁의 핵심이 제도개혁에 있음에도 의대 정원 이슈에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 결과 의료개혁은 시작도 하기 전에 동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노동시장 개혁도 의료개혁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문제가 있다며 불쑥 ‘주 69시간 근로’를 노동시장 개혁의 핵심과제로 들고 나왔다. 이 역시 근로시간 유연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정책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잘못된 것은 근로시간 유연화 이슈가 노동시장 개혁의 본질이 아니라는데 있다.

노동시장 개혁의 핵심은 정규직 대 비정규직 및 자영업으로 양분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하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고용구조를 다양화하고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긴 근로시간을 효과적으로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근로시간 유연화를 하나의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엽적인 근로시간 유연화 이슈에 매몰된 결과 정작 핵심적인 노동시장 개혁 과제는 손도 대지 못하고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데일리

(사진=대한의사협회, 이데일리DB)


두 개혁 정책 실패에는 지엽적인 부분에 매몰돼 개혁의 본령을 잃어버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숫자는 단순명료하고 목표를 뚜렷이 할 수 있어 응집력이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구조적 문제를 오로지 숫자 하나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한계 역시 분명하다. 숫자를 내세우려면 그 뒤에 숫자를 뒷받침하는 정교하고 치밀한 정책 내용이 버티고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개혁에 대한 저항에 밀릴 수밖에 없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논란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논지의 핵심은 비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는 R&D 예산을 개혁하는 것이다. 당연히 필요한 개혁이다. 그렇다면 효율적 예산 집행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이 핵심이 돼야 하는데 불쑥 R&D 예산 삭감을 먼저 들고 나왔다.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고 결국 개혁은 좌초됐다.

세밀한 정책 청사진 없이 덜렁 숫자 하나 내놓고 정부를 믿고 따르라는 것은 개발시대에나 통하던 방법이다. 시대를 잘못 읽은 데다 정책 기능까지 부재했다. 이런 모습은 국민에게 오만과 불통으로 비춰지기 충분했다.

여당의 총선 참패는 보수에 대한 진보의 승리와 같은 거창한 이념적 평가의 결과가 아니다. 일련의 정책들에 대한 정부의 무능과 오만에 대한 질타의 성격이 짙다.

한국경제는 지금 가라앉고 있다.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20년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아니 더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필자의 2023년 10월10일자 <[목멱칼럼]한국판 ‘잃어버린 20년’ 피하려면> 참조)

한국경제의 지속가능성이 의심받고 있는 지금 필요한 것은 가라앉고 있는 한국경제를 구출할 실사구시적 개혁 정책이다. 그 정책이 진보와 보수 어느 이념에 기초한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정책이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