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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만물상] 미국이 영웅을 보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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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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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 무덤이 있는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본당 바닥에는 1차 대전 전사자 중 한 명을 무작위로 뽑아 만든 무명용사의 무덤이 있다. 전몰 군인을 기리는 상징이다. 바닥에 있는 다른 무덤은 밟아도 되지만 이곳만은 안 된다. 1923년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결혼식 때 신부가 입장하던 중 전사자인 오빠 퍼거스를 추모하며 이 무덤 위에 부케를 올렸다. 이후 로열 웨딩이 있을 때 신부는 무명용사 무덤 위에 부케를 놓는다. 그리고 온 국민이 그 장면을 지켜본다.

▶프랑스 팡테옹은 조국을 대표하는 위인 81명이 묻힌 곳인데, 주로 문화 과학 쪽 인물이 많다. 퀴리 부부,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장자크 루소 같은 이름이다. 고인이 세상을 뜨면 상당 시간 역사적 평가를 거친 뒤 이곳으로 이장한다. 벽에 관이 들어갈 광중(壙中)을 파고 안장한 다음, 위인의 이름과 생몰년이 새겨진 석재 뚜껑을 덮는다. 안장 대상자는 대통령이 결정하는데, 프랑수아 올랑드 재임 때 레지스탕스 여성 4명을 동시에 이장했다.

▶미국은 연방 의사당의 로툰다 홀에서 유해 일반 공개(Lying in state) 의식을 치른다. 직경 29m, 높이 55m의 둥근 공간에 모여 연방정부가 고인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표한다. 대상에는 링컨, 케네디 같은 전직 대통령 13명이 포함돼 있다. 맥아더를 비롯한 육·해군 대원수급도 여럿 있고, FBI 초대 국장, 연방 대법원 판사의 이름도 보인다. 그리고 1958년 한국전쟁 무명용사도 이곳에서 의전 행사를 가졌다.

▶엊그제 같은 곳에서 대통령급 예우를 받는 조문 행사가 있었다. 지난달 8일 세상을 뜬 랠프 퍼켓 주니어 예비역 대령이다. 여야 지도부가 초당적 협조로 관련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양당 의원들이 나란히 섞어 앉아 고인을 추모했다. 전쟁 영웅 앞에 진영 구별은 무의미했다. 6·25 참전 용사인 고인은 1950년 가을 청천강 일대 205고지에서 중공군과 싸웠고, 수류탄 파편이 왼쪽 허벅지를 뚫었다. 그는 구조를 거부하고 전투를 지휘했다.

▶유럽 시골을 자동차로 여행하면 가끔 동네 입구 추모비를 본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산화한 이 마을 출신 젊은이들의 이름’이다. 낯선 여행객마저 숙연해진다. 미국에서는 말 6마리가 이끄는 운구 마차와 함께, 유족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성조기를 전달하는 군 참모총장의 사진을 본다. 이것이 ‘미국이 영웅을 보내는 법’이라고 생각했으나, 곰곰 따져보니 ‘미국이 영웅을 길러내는 법’이었다./

[김광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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