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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남자를 따라다니는 여성 스토커… 이것은 배우의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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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 넷플릭스 2주 연속 글로벌 1위

조선일보

마사(오른쪽·제시카 거닝)는 매일 도니(리처드 개드)가 일하는 술집에 찾아와 성희롱을 일삼고, 자신이 부유한 변호사라며 허언을 늘어놓는다. 친구들은 “언제 결혼할 거냐”며 두 사람을 놀리고, 그럴수록 마사의 망상은 심해진다.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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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주연 배우 리처드 개드는 애써 연기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난 최악의 사건을 복기할 뿐이다. 그때 왜 나는 그 여자에게 차 한 잔을 건넸을까. 왜 제때 신고하지 않았을까. 연극 치료를 하듯, 개드는 고통을 되풀이하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조금씩 받아들인다.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의 7부작 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는 제작자 겸 주연 배우인 리처드 개드가 중년 여성에게 스토킹 당했던 경험을 담았다. 2주 연속 넷플릭스 TV쇼 부문 글로벌 1위(플릭스 패트롤 기준)를 기록했고, 영국에선 네티즌 수사대가 실제 가해자를 찾아나서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피해자가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범죄 스릴러 장르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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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정인성


모든 비극은 차 한 잔에서 시작됐다. 바텐더 도니(리처드 개드)는 술집에 혼자 들어온 나이 든 여성을 불쌍히 여긴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거구, 불안해 보이는 눈빛, 바에 앉아 혼자 훌쩍이기 시작한 마사(제시카 거닝)에게 그는 따뜻한 차를 한 잔 대접한다. 그 순간부터 마사는 달콤한 망상에 빠진다. 마사는 도니의 집과 직장에 불쑥 나타나기 시작하고, “아기 순록(Baby Reindeer)”이라 부르며 하루에 수십 통의 음란 메일을 퍼붓는다.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는 통상적인 관념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블랙 코미디처럼 그려진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감히 할 수 없을 법한 자조적인 유머가 전반에 깔렸다. 친구들은 마사와 도니의 관계를 안줏거리로 삼아 낄낄대고, 도니 역시 처음엔 마사의 희롱을 농담처럼 몇 번 받아준다. 경찰도 메일을 보곤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데요?”라며 신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마사는 여성 스토커의 대명사 ‘미저리’의 뒤를 이을 만한 캐릭터다. 미저리의 원작자 스티븐 킹도 드라마를 보고 “맙소사(Holy Shit)”라며 짧고 굵은 후기를 남겼다. 마사는 스마트 기기로 업그레이드된 21세기 미저리다. 24시간 도니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도니의 부모·친구까지 마수를 뻗친다.

실제 개드는 4년 반 동안 4만여 통의 메일, 350시간 분량의 음성 메시지, 106장의 편지를 받으며 스토킹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개드는 마사를 단순한 악당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도니는 스토킹을 정신병으로 보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마사에게 동병상련을 느낀다. 도니의 우유부단함에 “왜 저래” 소리가 절로 나오다가도, 배우 제시카 거닝의 연기에 설득된다. 거닝은 천진난만함과 광기를 오가며 연민과 혐오, 공포를 동시에 자아낸다.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1960~1970년대 올드팝도 적재적소에 흐르며 외로운 두 사람을 자연스레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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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베이비 레인디어'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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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의 스토킹에 시달리던 도니는 여태까지 외면해왔던 트라우마와 마주한다. 타인의 인정에 굶주려 있던 도니는 “넌 재능이 있다. 같이 일해보자”는 꼬임에 넘어갔다가 성공한 남성 작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그는 더 악랄한 범죄는 고발하지 못하고, 마사의 스토킹만 신고하려는 모순에 빠진다. 성범죄 피해자가 겪는 수치심과 혼란, 자기혐오, 종국에는 자기 파괴에 이르는 과정을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그린다.

마약과 성폭력 장면이 다수 포함된 4화는 보기 고통스러울 정도다. 아무리 직접 겪은 일이라 하더라도, 범죄 피해를 불필요하게 자세히 묘사했다는 비판도 따랐다. 그럼에도 글로벌 비평 사이트 IMDb의 회차별 평점 중 4화가 제일 높은 점수를 받은 건, 개드의 용기 있는 고백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출발한 드라마는 끝나고도 다시 현실로 이어졌다. 시청자들은 개드 주변의 인물들을 샅샅이 뒤져 실제 성폭행범이 누군지 찾아내려 했고, 엉뚱한 사람이 가해자로 몰려 사이버 테러를 당하면서 지난주 영국 경찰이 조사에 착수했다. 실제 가해자로 추정되는 여성은 넷플릭스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나섰다. ‘베이비 레인디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결말은 예측할 수 없지만,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린 올해의 문제작임엔 틀림없다.

[백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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