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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누워 피아노 연주하다 일어나 이마 찧어”…클래식 코미디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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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클래식 음악에 웃음을 접목한 독특한 피아니스트 주형기가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 참석한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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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과 코미디가 양립할 수 있을까. 영국 태생 한국인 피아니스트 주형기(51)는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6년 만에 내한한 그가 오는 4일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프로그램인 ‘가족음악회:유머레스크’에서 청중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연습실에서 만난 그는 “웃음과 코미디는 아주 깊은 감정까지 담을 수 있는 좋은 도구”라며 웃음 예찬론을 폈다.



“공연장에 갔는데 청중이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 엄숙해서 마치 장례식장에 온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가 일찍부터 클래식에 코미디를 접목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였다. “리사이틀을 창시한 프란츠 리스트는 연주 도중에 관객들과 와인을 마시기도 했어요. 모차르트는 16마디 만에 박수가 나오자 잠깐 멈췄다 연주를 이어갔지요.”



그는 “예전엔 공연장이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였다”며 자신을 고용한 귀족이 휴가를 보내주지 않자 연주 도중에 연주자들이 차례로 퇴장하는 교향곡 45번 ‘고별’도 사례로 꼽았다. “웃음과 유머를 통해 클래식 장벽을 낮추고 음악이 젊은층에 다가갈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어요.”



2004년 예후디 메뉴인 음악학교 동기생인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세이 이구데스만과 시작한 코믹 듀오 ‘이구데스만 & 주(igudesman & joo)’의 공연은 익살과 재치가 넘친다. 조율하다 잠이 드는 바이올리니스트, 신용카드 삽입을 요구하는 피아노, 거꾸로 매달린 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바이올린 활을 삼키는 진공청소기, 여기에 ‘모든 곡을 5초 안에 연주하기’도 있다.



“20년 전엔 이게 뭐냐고 의아한 눈길을 받기도 했지요. 지금은 빈의 세계적인 공연장에서 음악과 코미디 시리즈가 빠지지 않아요.” 그는 “공룡처럼 꿈쩍도 하지 않던 클래식계도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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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주형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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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서울 공연에서도 그는 클래식 음악에 있는 유머들을 쏙쏙 뽑아낸다. 베토벤의 곡을 비틀어 만든 ‘쿵후 엘리제’, 베토벤과 에릭 사티의 곡을 뒤섞은 ‘엘리제를 위한 명상곡’. ‘라흐마니노프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등을 들려준다. 스프링실내악축제 예술감독인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과 대니 구, 한수진 등도 함께한다. 그는 작곡과 편곡, 지휘에도 재능을 보인 전방위 음악가다.



피에로를 자처한 그의 재능을 대가들은 한눈에 알아봤다. 팝 가수 빌리 조엘은 그와 함께 공연하며 편곡을 맡기고 음반 녹음에도 연주자로 참여하게 했다. 배우 존 말코비치, 로저 무어도 주형기와 같이 공연하고 음반을 녹음했다. 정통 클래식 음악가들도 그의 유머 너머에 담긴 의미를 평가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액스 등이 그와 함께 공연하며 클래식 음악의 장벽을 낮추려는 그의 노력을 지지했다



8살 넘어 뒤늦게 피아노를 시작한 주형기는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이 80살 생일 공연에 부를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는 16살에 스트라빈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할 때까지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지 못했다.



“커티스 음악원에 낙방해서 낙심했는데, 내가 우승한 콩쿠르에서 커티스 음악원 학생들이 낙방하더군요.” 그는 “그제야 내게도 어느 정도는 희망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웃었다.



그는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도 열성이다. “실수를 통해 사람들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었어요. 실수를 통해 발전했다고 할까요.” 그는 연습실 피아노 아래 눕더니 실수를 통해 배운 사례를 몸으로 시연했다. “누워서 연주하고 일어나다 이렇게 피아노에 이마를 찧어버렸어요. 실수였는데 청중이 마구 웃더군요.” 이후 그의 공연에서 고정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실수도 중요하다고 가르친다”며 “다만, 실수가 너무 잦거나 게임이 되어선 곤란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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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에 웃음을 접목해 가수 빌리 조엘, 배우 존 말코비치, 로저 무어 등과 함께 공연한 영국 태생 한국인 피아니스트 주형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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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악을 통해 더 나은 연주자,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어요.” 그는 실내악 예찬론자이기도 하다. “독주는 독재자처럼 혼자 모든 걸 제어할 수 있죠. 하지만 실내악에선 싸우든, 대화하든 서로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는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어도 서로 말을 하고 들어줄 수 있는 사회라야 한다”며 “연주자도, 청중도 실내악에서 대화와 경청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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