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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입술에 관한 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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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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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근처. 이즈음 물에 잠긴 논을 보면 올해 농사를 준비하는 설렘이 가득하다. 논두렁은 논과 논을 구획하는 경계이지만 또한 길고 좁은 밭뙈기이기도 하다. 옛날 모내기 끝내고 어머니는 그 자투리땅도 그냥 놀릴 수 없다며, 호박이나 울콩을 심으셨지. 지난주 고향 가서 논두렁에 서서 술동이에서 막걸리 익어가듯 논바닥에서 뻐끔뻐끔 올라오는 기포를 보았다. 문득 들판의 논들을 아담하게 죄는 이 야무진 논두렁이 어째 꼭 얼굴의 입술 같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 하나가 흘러나오지 않겠는가.

입술, 인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야 손바닥보다 좁아도 만만한 장소가 결코 아닌 것.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퀴즈.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면 사라지는 게 뭘까? 침묵이다. 침묵의 일번지인 입술. 솜털이 몹시도 나부끼는 몸의 피부에서 드물게 황무지 같은 입술에 대해 몇 가지 더할 이야기가 있다.

뒤늦게 발심하여 한문을 공부할 때 초심자로서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한다.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지만 가장 나은 건 입술을 움직여 문장이 노골노골해지도록 외는 게 가장 좋다. 어느 해 고전번역원 여름특강에서 맹자를 강의하시던 선생님.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라면서 특히 상구를 강조하셨다. 上口(상구), 즉 입에 올리라는 것. 더 정확히 새긴다면 입술 위에 한자를 얹어놓고 중얼거리라는 뜻이었다.

입술로 글 읽는 소리는 망외의 소득을 이끌기도 한다. 일본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 어린 시절 할아버지 무르팍에 앉아 수염 밑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그 뜻도 모른 채 무조건 따라 외웠다고 한다. 이른바 소독(素讀)이라는 것이다. 그가 중간자의 존재를 예언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거머쥔 건 이런 한문 공부가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옛 생각에 잠겼다가 입술 같은 논두렁을 빠져나올 때 논으로 와글와글 쏟아지는 햇빛의 구조가 보이는 것 같다. 그 햇살 속 칸칸마다 그리운 얼굴들. 그리고 다시 어머니 생각. 어느 날 <가요무대> 끝나자, 노안을 찌푸리며 옥편과 <논어>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나를 안쓰럽게 보시며 하시던 말씀. “새복(새벽)에 쌀 안치러 정지(부엌)에 나갈 때, 너거 아부지 새집 할아버지한테 가서 글 읽는 소리, 담부랑 너머 들릴 때, 그거 얼마나 좋은지 아나?”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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