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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뽕짝은 죽지 않는다, 이박사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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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뉴진스 아버지’ 열광한

칠순의 뽕짝 가수 귀환

학위는 없다. 그래도 ‘박사’다. 졸업장은 국민학교에서 딴 게 전부지만, 그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박사(博士)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내가 기억력은 타고났어요. 노래가 주르륵 나와.” 인공지능 수준의 가사 암기 처리. 박자를 제멋대로 섞어버리는 응용 연산. “좋아~좋아~좋아!”로 대표되는 저세상 애드리브. 목소리 하나로 가창에 반주에 추임새까지 혼자 다 해버리는, 그리하여 ‘뽕짝의 제왕’으로 불린 남자. 가수 이박사(70·본명 이용석)다.

뭔가 허전하다면 ‘신바람’을 넣어야 한다. “나는 무조건 즉흥이에요. 연습도 많이 안 해요. 느끼한 거 안 좋아해.” 가락에 시동을 걸자마자 자동으로 몸이 들썩이는 마법. 애환을 잡아다 패대기치는 쾌속의 목청. 누구든 엉치뼈를 어정쩡 뒤로 빼고 양손을 좌우로 흔들게 되는 것이며, 어느새 묵은 시름이 다소간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신바람 이박사’로 걸어온 뽕짝 외길 35년, 신바람 절실한 시대, 그가 돌아왔다.

◇B급인 척하는 S급… ‘광대’의 재평가

조선일보

아직 늙지 않았다. 칠순의 이박사는 “연예인이니까 새로운 걸 보여주겠다”며 “귀를 긁어주는 디스코 민요를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시노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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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이 길었다. 한때 ‘테크노 뽕짝’으로 21세기 대중음악의 서막을 열어젖힌 선구자는 잊혔다. 일찌감치 일본에 진출해 1세대 한류 가수로 활동한 수퍼스타, ‘Pon-chak’을 전파하며 국위 선양했던 그의 지난날에 대해선 차차 얘기하기로 하자. 중요한 건 최근의 트로트 열풍 속에서, 20년 가까이 뜸했던 칠순의 가수가 젊은이들에게 재각광받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이 빗발칩니다.

“남이 안 하는 걸 좋아해요. 내가 관광버스 가이드였잖아요. 그때부터 시도한 거예요. 민요도 하고 유행가도 하고, 지루하면 안 되니까 스피드를 살릴 겸 테크노풍으로 옷을 바꿔 입힌 거지.”

예전엔 ‘B급’으로 불렸는데요.

“광대(廣大) 같다고도 하고. 광대 뜻 좋잖아요. 크다는 건데. 누가 뭐라든 크게 신경 안 써요.”

‘잇~히!’ ‘후루루루히!’ 이박사표 독창성의 재발굴에는 ‘뉴진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예 프로듀서 이오공(42)의 역할도 컸다. 한국적 정서 ‘뽕’의 기원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뽕을 찾아서’를 제작하고, 이박사의 노래를 편곡해 세상에 내놓고, 그에 대한 존경을 수차례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박사는 목소리만으로 세상에 없던 장르를 통째로 만들어버린 존재다.”

요즘 세대가 특히 좋아합니다.

“듣는 노래, 보는 노래, 즐기는 노래가 있어요. 내 노래는 마지막 거. 같이 춤추는 노래.”

순식간에 무대를 장악하는 능력은 후배 뮤지션과의 협연에서도 드러난다.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에서 밴드 윈디시티와 합을 맞췄을 때처럼. 목에 템버린 하나 걸고 나와 몇 번의 타음(打音)만으로 관중을 광란으로 이끌었다.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에 “B급인 척하는 S급”이라는 댓글이 달려 있다. 열화와 같은 성원이 또 한 번의 공연으로 성사됐다. “8월에도 윈디시티랑 노래해요. 전주에서.”

올해 신곡도 내셨죠.

“타이틀곡 제목 ‘사우나’. 아무개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놓칠까 두려워서 잠 못 들고~ 아무개는 주머니가 텅텅 비어 꿈길에도 돈을 쫓아 헤매지만~ 사우나 안에서 마주 보면 모두가 어리숙한 벌거숭이.”

◇관광버스, 전설의 시작

조선일보

건반 반주에 맞춰 '영맨'을 노래하고 있는 40대의 이박사. 뒤에 뮤직비디오 소품으로 쓰인 식당차가 보인다. /소니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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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보니 벌거숭이였다. 대금을 불던 부친은 일찌감치 세상을 떴고, 경기민요를 했던 모친은 떡을 해다 시장에 팔아 집안을 건사했다. 삼 형제 중 막내,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아이스케키 장사, 구두닦이, 이발사…. “다방에서 일하면서 산타나·딥퍼플 같은 팝송을 많이 접했다”고 했다. “양복점 시다로도 일했고 나중에는 운영까지 했죠.”

관광버스는 언제부터 타셨나요?

“1978년, 여행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해서요. 가방 하나 들고 서울 은평구 ‘매일관광’에 찾아갔어요. 차고에서 신문지 깔고 자다가, 아침 5시에 출발해서는 새벽 1시에 돌아왔죠.”

적성에 맞았나요?

“마이크 잡고 인사하는 법부터 관광지 안내서까지 달달 외웠어요. 철칙은 딱 하나, 절대 분위기 다운되면 안 된다. 버스에 ‘리듬박스’가 있어요. 쿵짝쿵짝 박자 맞춰 열심히 노래하다 보면 팁이 들어와요. 하루 70만원 넘게 번 날도 있어요. 손님들이 저를 ‘신나는 이군’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다 ‘신바람 이박사’가 된 건가요?

“음악인 집안이잖아요. 메들리로 수백 곡은 불렀어요. 노래를 이렇게 많이 알면 박사다, 게다가 신난다, 신바람 이박사.”

모친에게 배운 타령을 재해석한 빨랫줄 창법, 버스 바닥이 들썩일 정도로 뽕을 빼놓는 주말이 쌓여 11년이 흘렀다. 손님 중에 레코드회사 사장도 있었다. “테이프를 하나 내자고 그러더라고요. 당시 유행가 33곡을 NG없이 한방에 녹음했어요.” 1989년 나온 ‘신바람 이박사 메들리’는 길보드 차트 공전의 히트를 쳤다. “보너스로 당시 돈 1000만원을 받았다”고 했다. TV에도 출연했다. 이박사는 이제 전국구였다.

◇日에서 모셔간 1세대 한류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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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박사가 국내에서 낸 1·2집 앨범. 길보드 차트를 휩쓴 메들리의 선풍적 인기에는 못미쳤지만, 이윽고 일본에서 대박을 일궈낸다. /오아시스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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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전속 제안이 왔다. 꿈에 그리던 정식 데뷔의 순간. 1집 앨범을 냈지만 메들리만큼 반응이 오지는 않았다. “막연히 남진·나훈아처럼 노래하려고 했던가 봐요. 내 스타일을 잊고 있었어요.” 그러던 1995년, 일본에서 러브콜이 왔다. 당시 최고의 음반사 소니 뮤직이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일본 직원이 서울에 놀러왔다가 제 테이프를 들었나 봐요. 가져가서 사장한테도 소개한 거죠. 마음에 들었나 봐요. 전속 계약금만 ‘몇 장’ 됐어요. 월세 살다가 집을 샀으니까.”

현지 반응은 어땠나요?

“일단 자리에서 다 일어나요. 앉아 있는 사람이 없어요. 대문 앞에 ‘이박사 사랑해요’ 현수막 붙여놓고. 저 때문에 한국어를 배운다고 하더라고요. 아, 노래가 좋으면 그 나라 말을 배워서라도 듣는구나.”

BTS 이전에 이박사가 있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몽키 매직’ ‘영맨’ 등 기존 일본 노래에 직접 한국말 가사를 붙였다. “일본말 하나도 몰랐어요. 우리말 배우기도 바쁜데.” 그래도 열도는 환호했다. 이듬해 ‘이박사의 뽕짝 대백과’로 일본가요대상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CF에서는 ‘강원도 아리랑’을 개사해 불렀다. 도쿄 최고의 공연장 부도칸(武道館)까지 접수했다. 꽹과리를 든 채.

1만석 전석 매진이었죠?

“스피커가 하늘에 뜬 것 같았어요. 음향이 끝내줘. 마이크가 살살 돌아가. 차로 말하자면 버스에서 벤츠 탄 건데, 하루 두 번 1시간 30분씩 공연해도 힘 하나도 안 들었어요.”

–도쿄대에서 강연도 하셨죠.

“내 노래를 알아주는구나, 명문대 맞네. 강당이 꽉 차서 뒤에도 서 있더라고요. 한국 뽕짝과 일본 엔카가 뭐가 다른지 설명했어요. 일본 노래는 목으로 부르고, 한국 노래는 가슴으로 부른다. 일본 노래는 감미롭다. 우리는 터뜨린다.”

“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의 신바람 이박삽니다.” 트레이드마크 인사말처럼 하루아침에 국가대표가 돼버린 이박사, 내친김에 북한 금강산까지 갔다. 2001년이었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후 유람선이 아닌 금강산 현지에서 열리는 연예인 단독 공연은 처음이었다.

감개무량했겠습니다.

“으스스했어요. 관객들이 부동 자세예요. 거의 2시간 공연했는데 ‘아리랑’ 부를 때만 박수 치더라고요. 웬 경호원 셋이 나를 따라다니는데, 자기들끼리도 서로 감시를 하는 눈치예요. 집에 돌아오면서 절감했죠.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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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살충제 브랜드 긴초(KINCHO) 광고에 출연한 이박사. '강원도 아리랑'을 개사한 CM송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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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나무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비유가 아니다. 그해 서울 장위동 자택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집 앞에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장미 넝쿨이 감겨있더라고요. 그거 자르려고 가위 들고 올라갔죠. 내려다보니 별로 안 높아 보였어요. 비도 오고 해서 에잇, 그냥 뛰었죠.”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복합 골절이었다.

그래서 활동이 중단됐군요.

“7~8년 놀았죠. 노래 한 곡에 1000만원씩 받던 때였는데, 잡혀 있던 공연 전부 취소되고, 선금 돌려주고, 위약금 내고…. 그래도 명색이 가수인데, 다리 절룩이는 걸 보이고 싶지가 않았어요.”

오른쪽 다리도 다치셨다고요.

“왼쪽 다리가 거의 나을 무렵인데, 집 대문 문지방에 발이 걸려서 계단을 굴렀어요. 앞니도 네 개 나가고.”

금전 사기까지….

“지인한테 돈 줬는데 못 받았어요. 자꾸 그런 얘기해서 뭘 해. 이하 생략.”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다 접고 산에 들어갈까, 괜히 한강에도 가보고…. 신문지 펼쳐 놓고 붓글씨로 천자문 수백 번 쓰면서 마음을 다스렸죠. 밤이 있으면 낮이 오고, 낮 있으면 밤이 온다. 이제 밤이 왔구나.”

◇뽕짝뽕짝, 인생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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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서울 홍대 인근에서 만난 가수 이박사. "늘 노래가 있어야 한다"며 자신의 최신곡을 핸드폰으로 틀어놓고 사진을 촬영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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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고, 배신, 이혼…. 겨우 마음 다잡고 복귀를 준비했지만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얼마 전에도 일본 음반사에서 전속 계약하자고 일곱 번이나 찾아왔어요. 거절했어요. 일단 음식이 안 맞아서. 나는 한국이 좋아요. 어제는 지나갔어요. 오늘을 살아야 해요.”

칠순이 되셨네요.

“잔칫집 공연 가면 말이죠, 환갑은 본인이, 칠순은 아들·딸이, 팔순 잔치는 손주들이 즐겨요. 갈수록 인생의 새로운 맛을 알게 된다.”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 중에 ‘인생은 60부터’가 있다. 몇 년 전 슬쩍 가사를 바꿨다. ‘인생은 70부터야’라고.

몸은 좀 어떠세요?

“계단을 뛰어 오르지는 못하지만, 다 나았어요.”

다들 살기 힘들다네요.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돈 있으나 없으나 요 하나 깔고 자는 인생. 힘냅시다.”

무대가 도쿄 부도칸에서 종로 국일관으로 바뀌었어도 있는 흥껏 노래한다. “큰 무대 있으면 좋고, 또 지금 무대가 주어졌으면 노래해야죠. 연예인이니까 새로운 걸 보여줄 거예요.” 전국 팔도를 누빈다. 다시 고속버스를 탄다. “차 막히는데 이게 속 편해요.” 이 대목에서 불러보는 이박사 대표곡 ‘스페이스 환타지’ 한 곡조. “마이크 잡으면 무조건 오케이~ 세상이 끝난다 해도 노래 불러~ 손가락질받아도 언제나 뽕짝.”

박사님, 뽕짝은 무엇입니까.

“사람 같아요. 뽕짝뽕짝, 두 박자가 걸어가니까.”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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