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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싫은 소리’ 할 수 있어야 어른…‘하되 함 없이 하기’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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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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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권위를 내세우는 나이 든 사람을 비하하는 은어입니다. 들었을 때 기분 좋은 말은 아닙니다. 저 자신도 특히 젊은이들과의 만남에서는 소위 꼰대나 ‘라떼’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꼰대란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말과 태도에서부터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원은 아마도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문화, 즉 장유유서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아이와 어른 사이에는 순서가 있으니 나이 든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윤리에서 온 것이죠.



그런데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같이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윗대에게서 지혜를 느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어른임을 인정받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나이가 들수록 자기중심성이 더 강해지고 완고해지면 결국은 젊은이들에게서 외면당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나 때는 이랬는데 말이야”라고 하면서 젊은이들이나 세태를 비난하면 “그건 그때 얘기고요, 지금은 아니지요”라는 반응이 돌아올 겁니다.





이강인 키운 손흥민





근래에는 나이 좀 든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면 적지 않은 경우 꼰대라고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윗대의 조언이나 업무상 지적에도 꼰대 낙인을 찍기에, 우리 사회가 어느 순간부터 꼰대가 되지 않으려 위축돼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정이나 조직에서 사람을 키우려면 싫은 소리, 쓴소리도 해야 합니다. 소위 말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능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직에서도 꼰대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리더들이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지난 1월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대회에서 있었던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과 이강인의 불화설을 뉴스로 들으면서 그 조직에는 어른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클린스만 감독과 축구협회는 리더로서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당사자끼리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처신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과거에는 감독이나 코치들이 선수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고 혼을 냈습니다. 물론 폭력은 문제입니다만, 지금은 너무 방임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그 사건에서 진정한 리더는 손흥민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장으로서 지적할 것을 분명하게 말했고, 사후에도 함부로 외부에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않았지요. 이강인이 영국으로 와서 사과했을 때도, 캡틴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팬들에게 그를 용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진정한 리더로서 후배 이강인을 키운 것이지요.



회사 은퇴 후에 몸담은 한 시민단체가 있습니다. 그 재단의 취지에 공감해서 시작된 인연이었지만 이사가 된 지 7년이 넘었고 나이도 있어, 이젠 그만둘 때가 된 듯싶다고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내가 특별히 기여하는 바도 없고 그 재단의 일에 전문성을 가진 것도 아닌데 오래 했으니 이젠 후임이사 영입 작업을 시작해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이사회에서 이사장과 상임이사가 “그래도 못하게 하는 일은 하시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그 재단의 일과 관련해서 두세번인가 제동을 걸었던 게 생각났습니다. 그걸 잘한 일이라고 평가해준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계시기만 해도 도움이 되니 연임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내 나름대로 그간 살아오면서 했던 경험과 소신을 담아 “노”(No)라고 했던 것을 지혜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 같았습니다. 내 존재만으로 도움이 된다는 얘기는 정말 고마웠습니다. 물러나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노년의 지혜가 아니라 불교에서 말하듯 ‘하되 함 없이 하는 것’이 노년에 사람 키우는 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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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하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나이가 든다는 건 결국 사람을 키워내는 일, 그 역할로 종결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로 사람은 가정에서 자식들을 키우고 사회 활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일합니다. 그리하여 은퇴 뒤 노년을 맞으면 “자식들 키우느라고 애 많이 썼겠네” “회사 생활하면서 후배 가르치고 키우느라고 수고 많았겠네”라는 말을 듣습니다. 언뜻 더 이상 키울 사람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자식은 장성했고 은퇴 뒤엔 내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정과 사회에서 사람 키우는 여정이 합쳐지는 지점인 노년엔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을 키우는 길로 들어서는 것 같습니다. 뒷짐 지고 나 몰라라 하거나 내 경험과 노하우를 젊은 세대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후배·후학에게 기회를 주는 역할을 하면서요.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인공으로 클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의사결정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주지시켜야 합니다. 내가 주도하고 결단하고 책임지는 것이 더 이상 내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각인시키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나를 드러내고 가르치려 드는 버릇이 나타나곤 하니까요. 간혹 어려운 상황에 처한 후배를 만나게 되면 ‘나는 해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답은 이 사람이 내는 것’이라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저 상황에 대해 묻고, 그가 처한 어려움과 그의 생각을 이해하려 할 뿐입니다. 이렇게 대화하다 보면 그 사람은 스스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고 가야 할 길을 찾아갑니다.



제가 현직에 있을 때부터 그 취지에 적극 공감해서 기업의 사회 기여 차원에서 여러 곳의 지원을 이끌어내 도왔던 한 단체가 있습니다. 조직 구조 디자인, 리더 승계 프로그램, 그리고 안식년제 도입 등에 대해 몇가지 제안을 했고 또 젊은 실무자들을 그룹이나 일대일로 만나서 대화하는 시간도 종종 가졌습니다. 그들이 조직에서 일하면서 겪는 여러 갈등과 어려움에 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해결책을 주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저와의 대화를 통해서 마음이 밝아지고 가벼워짐으로써 그들 스스로 일을 해결할 에너지를 얻어낸다고 느꼈습니다. 그 단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일이었는데 이 역시도 사람 키우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11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 김장하’를 최근에 감명 깊게 봤습니다. 한약사로서 평생을 남 돕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그는 엄격한 자기 원칙을 지켜온 분이었습니다. 그냥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서지 않고 알려지려 하지 않았지요. 책 ‘풍운아 채현국’의 주인공 채현국 선생은 생전에 두어번 식사 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꼰대들에게 속지 말라”고 외치신, 청년보다 더 청년 같은 분이셨지요. 두 분 모두 위축되지 않은 어른들이셨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어른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삶을 배우는 사람





2016년 엘지(LG) 인화원장으로 퇴임한 뒤 삶의 방향을 ‘느리고 조용히 심심하게’로 바꿨다. 은퇴와 노화를 함께 겪으며, 그 안에서 성장하는 삶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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