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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미중 반도체 전쟁 영원한 승자는 없다[김상운의 빽투더퓨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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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반도체 경쟁의 역사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對中) 수출통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한 결과 중국의 반도체 기술수준은 미국에 비해 수 년 뒤쳐졌다.”

최근 지나 러몬드 미국 상무장관이 CBS와의 인터뷰에서 대중 수출제재 강화를 시사하면서 덧붙인 말입니다. 미국 반도체 제재의 핵심 타켓인 화웨이가 작년 8월 7나노 칩이 들어간 최신 스마트폰(메이트 60 프로)을 출시해 미국을 놀라게 한 ‘화웨이 쇼크’를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됩니다. 미국은 화웨이가 자국 안보를 위협한다며 미국산 기술이 포함된 부품, 장비의 중국 유입을 틀어막았지만, 화웨이는 보란듯이 미국의 예상보다 앞선 기술이 적용된 칩을 생산했죠.

갈수록 첨예해지고 있는 미중 ‘반도체 전쟁’은 대만 이슈와도 얽혀 한층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대만 TSMC가 양안전쟁으로 가동을 멈추면 글로벌 경제에 치명타를 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중국 고립은 실현 가능하며, 중국의 기술발전 속도를 정말 늦출 수 있을까요.

中 ‘글로벌 공급망’ 분리 어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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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4월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및 공급망 회복력에 관한 CEO 서밋’에 참석해 실리콘 웨이퍼를 들고 있다. AP=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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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의 대중 고립화 전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냉전시대 블록경제가 연상됩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각자 자신의 진영 내에서 무역을 벌이는 폐쇄적 경제구조를 운영했습니다. 예컨대 미국이 마셜플랜으로 서유럽의 경제부흥을 이끌자, 소련은 코메콘(COMECON)을 중심으로 공산권 국가간 원조경제 체제를 구축합니다(북한은 자립경제 노선을 추구하면서 코메콘 가입을 거부)

2차대전 직후 경제복구가 막 이뤄지는 시점부터 블록경제가 형성됐기에 미소 양 진영의 경제 분리는 역사적 뿌리가 깊었습니다. 이에 비해 중국은 1970년대 경제개방부터 시작해 2001년 WTO 가입에 이르기까지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 오랫동안 참여했기에 ‘디커플링(공급망 등의 분리)’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세계 경제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고도성장으로 나아간 배경에는 거대 생산지이자 시장 역할을 해 온 중국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만큼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미중은 서로 깊이 연결돼 있다는 얘기죠.

美-동맹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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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출통제에도 화웨이가 7나노 칩을 탑재해 지난해 8월 선보인 ‘메이트 60 프로’ 스마트폰. 화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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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미국이 중국에 대해 ‘반도체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얼까요. 그것은 극소수의 기업들이 부품이나 소재를 독과점으로 공급하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에서 비롯됩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반도체 제조 공정의 역사를 잠깐 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47년 월터 브래튼과 존 바딘의 실험을 계기로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낸 반도체는 실리콘 웨이퍼 위에 최대한 많은 수의 트랜지스터를 올리기 위한 분투의 과정을 밟게 됩니다. 이른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개념인데요, 일종의 스위치 역할을 하는 트랜지스터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면서 정보(0 혹은 1의 2진수)를 전달하기에 얼마나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느냐에 따라 비용 대비 성능이 결정됩니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트랜지스터의 크기를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절반 정도까지 줄이면서 웨이퍼 위에서 이들을 잇는 미세 회로를 그리는 첨단기술(리소그래피·노광)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문제는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이 미세 회로를 그리려면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10~100나노미터의 파장을 지닌 극자외선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려면 태양의 표면 온도보다 뜨거운 섭씨 50만 도의 플라스마 상태를 만드는 초고난도 공정을 거쳐야하기에 그 진입장벽이 매우 높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이 독점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반도체 제조 소프트웨어는 미국과 독일에 소재한 3개사가 시장을 분점하고 있고,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는 삼성과 TSMC가 양분하는 구조입니다. 이처럼 반도체 장비, 생산, 소재 등에서 극소수의 기업들이 독과점 지위를 갖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들 모두가 미국이나 그 동맹국(한국, 대만, 일본, 서유럽 등) 소속이라는 겁니다. 이는 미국이 동맹국에 영향력을 행사해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 기술통제를 가할 수 있는 배경이 됩니다.

실제로 최근 SK하이닉스가 중국 우시 생산공장에 극자외선 리소그래피 장비를 배치하려고 하자, 미국 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 압력을 넣었죠. 이는 생산성과 직결되는 문제였지만, 미국의 전방위 압박에 굴복해 SK하이닉스는 결국 장비 반입을 포기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무기화 된 사례입니다. 일반적으로 각국이 경제교류를 통해 상호의존이 심화되면 전쟁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당사국 간에 갈등이 생기면 경제, 기술적 상호의존을 오히려 상대를 압박하는 카드로 이용할 수 있죠. 현재 미중 간에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전쟁이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공급망 상호의존 美에 부메랑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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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가동 중인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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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이 무기화된 상호의존이 미국에도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갖고 있는 최대의 무기는 뭘까요. 그것은 바로 세계 최대 소비시장과 대만 침공 카드입니다. 트럼프 집권기부터 본격화 된 미국 정부의 반도체 수출통제에 대해 미국 기업들이 우려를 표하며 규제 완화를 요구한 건 중국에서 당장 거둘 수 있는 이익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최대 반도체 장비회사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는 정부 규제를 어기고 중국 기업(SMIC)에 제품을 판매한 혐의로 미 법무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죠.

사실 정부가 시장을 이길 수 있느냐는 고전적인 질문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꽤 있습니다. 아무리 미국 정부가 반도체 규제를 전방위로 가해도 중국을 포함해 전 세계가 얽혀있는 글로벌 공급망을 100% 통제하기는 힘들다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 2020년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 화웨이를 안보의 적으로 규정하고 각국 통신망 사업에서 화웨이 배제를 요구할 당시 영국 정부가 이를 거부한 게 대표적입니다. 당시 로버트 해니건 정부통신본부(GCHQ·영국 정보기관) 국장은 “서구가 중국의 기술발전을 억누를 수 있다며 스스로를 속이는 대신에, 우리는 미래에 중국이 기술강국이 되는 걸 받아들이며 그 위험을 지금부터 관리해야 한다”는 현실론을 피력했죠.

마치 미국이 2차대전 말기에 핵보유국이 되고서 혈맹인 영국에도 핵기술 통제를 실시했지만, 결국 소련은 물론 최근 북한까지 핵개발에 성공한 것처럼 기술개발을 영원히 틀어막을 순 없다는 입장을 밝힌 겁니다.

반도체 강국 연 ‘美 기술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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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삼성 창업자와 이건희 당시 부회장이 경기 기흥에 지어진 64K D램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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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국과 동맹국들 간에 균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근미래에 중국의 반도체 기술이 미국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는 미국에 이어 반도체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 한국, 대만의 역사적 사례를 훑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국가들 모두 정부와 기업의 부단한 노력이 빛을 발했지만, 미국의 기술이전 없이 퀀텀 점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없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죠.

예컨대 삼성전자가 D램 시장의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건 미국 반도체업계가 일본의 덤핑 판매로 위기에 처하자, 그 대항마로 한국으로 기술이전을 수용한 영향이 컸습니다. 실제로 이병철 삼성 창업자가 1983년 2월 8일 반도체 산업 진출을 선언할 당시 미국 마이크론과 64K D램 설계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죠.

미국 반도체업계 대부인 고든 무어 인텔 CEO가 “가치 있는 반도체 기술을 외국에 쉽게 넘겨준다”고 우려했지만, 일본의 공세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마이크론의 기술이전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미국 정부의 반(反)덤핑 압박에 1986년 일본 정부가 D램 대미 수출량을 제한한 것도 삼성이 반도체 신화를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습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건 미국의 대대적인 수출통제로 화웨이의 스마트폰 출하량이 2020년 2분기 세계 1위(5580만 대)에서 이듬해 2분기 8위(980만 대)로 급락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중국 정부가 제대로 된 보복에 나서지 않았다는 겁니다.

중국 정부는 자국 안보를 해치는 외국기업에 대해 ‘신뢰할 수 없는 기업 명단(unreliable entity list)’에 올리겠다고 공언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벗어나 중국 기업들이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결국 정리하면 ①냉전시기 소련과 달리 중국은 1970년대부터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에 편입된데다 ②중국이 세계 최대 소비시장을 갖고 있는 점 ③이로 인해 미국 반도체 업계 내에서 혹은 미국과 동맹국 간에 대중 제재를 둘러싼 균열이 일어날 경우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①극소수 기업들이 독과점을 유지하고 있는 반도체 공정의 특성 ②이들 독과점 기업들이 모두 미국과 동맹국들의 수중에 있다는 점 ③일본, 한국, 대만 등의 사례에서 보듯 반도체 기술발전을 위해선 미국으로부터 기술 이전이 필수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가까운 미래에 중국이 미국의 수출통제를 뚫고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됩니다.

단, 이는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동맹의 가치를 경시하는 트럼프가 재집권할 경우 예상 외의 변수가 생길 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고 문헌]
-크리스 밀러, 노정태 역 〈칩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2023년, 부키)

“모든 해답은 역사 속에 있다.” 초 단위로 넘치는 온라인 뉴스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연이은 뉴스들 사이에서 하나의 맥락이 보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학술 담당으로 역사 분야를 여러 해 취재한 기자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뉴스를 분석하고,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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