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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fn광장] 미래에 둔 마음, 서울미래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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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이소영 동화작가


1937년 사망한 시인 이상은 죽기 전에 '센비키야의 멜론'이 먹고 싶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 아내였던 변동림, 후에 개명한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에 나오는 일화이다. 실제 일본 도쿄에 가 보니 1897년 개업한 '긴자 센비키야' 과일가게가 있었다. 100년이 훌쩍 지난 가게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정갈한 현대적 가게였다. 가장 비싼 멜론에는 25만원가량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이층 카페로 올라가 멜론파르페를 시켜놓고 '정말 이상이 비싼 멜론을 사 먹었을지, 아니면 시인인 이상의 마지막 은유적 표현일지' 한참 수다를 떨었다.

책의 한 구절 덕분에 여행 중 가장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잊지 못할 기억을 만들게 되었다. 장소와 기억은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라지기 때문에 기억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면 멜론 같은 상징물이나 장소, 시간 등의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매개체로 '서울미래유산'을 들 수 있다. 서울미래유산은 2013년 서울시가 "개발논리에 사라지는 유·무형의 유산을 지켜나가겠다"는 취지로 도입한 정책이다. 서울미래유산은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 온 공통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건이나 인물 또는 일상의 이야기가 담긴 미래 세대에게 전할 100년 후의 보물로서 정치역사, 산업노동, 시민생활, 도시관리, 문화예술 등 5개 분야에서 당시 총 488개가 선정되었다. 이후 선정된 서울미래유산의 상당수는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임대료가 올라 경영난을 겪는데 등록에 따른 혜택은 없고 관리가 어려워지거나 재개발 등으로 취소되고 새로 선정하는 과정을 거쳐 2023년에 499개가 되었다.

서울미래유산인 '잠실종합운동장'에는 '장소에 남겨진 물리적 흔적과 아우라' '장소에 관한 집단기억' 그리고 기억의 재현체인 '기념물' 등의 장소에 대한 기억들이 남아 있다. 또 서울미래유산인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기억의 장소로 '낙랑파라'가 나온다. 지금은 사라진 낙랑파라는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 부근에 있었다. 투르게네프 50년제, 길진섭 소품전시회, 출판기념, 음악회 같은 이벤트가 수시로 열렸으며 1930년대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당시 10여편의 문학작품에 등장한다. 변동림은 시인 이상과 그녀의 사촌오빠가 경영하는 낙랑파라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만일 지금 낙랑파라가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기억의 장소로 1930년 시대의 역사를 해석하고 설명하면서 당시의 기억을 구축하거나 보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생명을 불어넣어 현재에 존속하는 힘을 갖고, 이를 통해 사회적 기억을 재생산하여 '우리'가 되는 집단기억을 만드는 데 공헌했을 것이다.

서울미래유산은 사라져가는 도시의 기억을 되살려 시민들의 집단기억을 통해 복원하고 보존하고자 한다. 기억은 장소 지향적이며, 적어도 장소 기반적인 경향이 있다. 사람은 각각 환경에 따라서 자신이 어떤 기억의 공동체에 속할 것인지를 인지한다. 집단의 공동의 체험과 소통을 통해 획득된 과거의 경험들을 의미하는 집단기억은 개인들이 간직한 기억들의 집합체로 집단 정체성의 기본요소가 된다.

미래유산은 발굴부터 보전·관리까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가 선정하는 문화재와 달리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시대 실학자 박지원은 '잘되고 못되고는 자신에게 달려 있고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려 있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미래의 사람들이 지금 정한 미래유산에 대해 왈가불가할 것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정확히 판단하고 정한 유산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미래에 둔 마음에 당당하다면 그뿐이다.

이소영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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