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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인터뷰]열렸다, 한국의 새 보물창고..."간송의 문화재는 우리민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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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마치고 관객 맞은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보화각 1938: 간송미술관 재개관전’ 개막

최초 공개 36점…간송 일기대장·보화각 설계도면 등 공개

올해로 설립 86주년을 맞은 보화각(간송미술관)이 1년 7개월의 보수·복원 공사를 마치고 새롭게 단장해 관객을 맞는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유출되는 서화와 도자기, 불상, 석탑 등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 보존하기 위해 설립한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문화를 통해 나라의 정신을 지킨다는 ‘문화보국(文化保國)’의 건립이념은 간송과 그의 두 아들, 그리고 그 장손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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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7개월간의 보수·복원 공사를 마치고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다시 문을 열었다.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이번 재개관전에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옛 이름) 최초 설계 도면, 미공개 서화 유물 등 수장고에 잠든 많은 자료를 찾았다고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사진 =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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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의 장손 전인건(53) 간송미술관장은 할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인상이나 풍채뿐만 아니라 조용하고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는 성격까지 비슷하다. 그는 조부의 삶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2013년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해 미술관의 적극적인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1년 7개월의 보수기간을 마치고 새롭게 문을 여는데,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화각은 1938년 지어진 건물이다. 이곳이 1년 중 4주는 미술관이지만, 나머지는 긴 기간 동안 연구소로 활용됐기 때문에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또 2019년 건물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보수와 복원 공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안에서 전시장 전체 면적을 늘릴 수 있을 만큼 확보하고, 빛과 조명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이번 재개관전에서는 공사 과정 중 수장고에서 발굴한 보화각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의 보화각 설계도와 기록에만 있던 화원화가 고진승의 나비 그림 '화접도' 등을 최초로 공개한다. 진열장을 개선해 전시 작품의 색을 정확히 볼 수 있게 하고, 자외선을 차단해 작품을 오래 보도록 했다.

-간송미술관의 ‘문화보국’ 정신은 무엇인가

▲일본이 국권을 침탈하기 100여 년 전까지 조선은 일본보다 문화적으로 앞서 나간 국가였다. 여기에서 비롯된 문화적 불안감에 일제는 창씨개명과 언어 말살 등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문화적 탄압을 우리 민족에게 가하고, 문화재를 조직적으로 수탈하고 파괴했다. 이에 간송께서는 전국 각지에 흩어진 문화재를 매입해 일제로부터 지키며 ‘문화보국’의 길을 개척해갔다. 이러한 ‘간송 컬렉션’을 토대로 탄생한 것이 보화각, 오늘의 간송미술관이다. 한국은 문화적 역량이 뛰어난 국가다. 꼭 최초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것을 세계 최고로 일궈내는 힘이 있다. 송나라의 청자를 발전시킨 고려청자나, 남종과 북종 화법을 독자적으로 재구성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있었고,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K-팝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역사를 이해하고 자긍심을 느끼도록 돕는 것이 ‘문화보국’ 정신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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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을 찾은 시민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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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에 이어 미술관장직을 이어받았는데, 선친의 유지였는지.

▲말씀하시거나, 강조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자연스럽게 아버지 곁에서 보고 들으며 행동을 통해 배우고 느꼈던 것 같다. 한 번은 학창 시절 아버지가 그림이 그리고 싶다고 하셔서 조부께서 유화 물감을 사주셨는데,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다 날씨가 너무 좋아 공놀이를 하러 나간 적이 있으셨다고 한다. 유화물감은 쓰고 나서 바로 씻지 않으면 굳어서 못쓰게 된다. 공놀이가 끝나고 몇 시간 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니 할아버지께서 붓을 깨끗이 씻어두셨고, 당연히 아버지는 혼날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 안 하셨다고 했다. 그 후 아버지께선 돌아가실 때까지 붓과 팔레트는 직접 씻어두시고, 조수를 두지 않고 작업하셨다. 아버지께선 말보다 행동으로 조부께 배우셨고, 나 역시 그렇게 느끼고 익혔다. 사실 아버지는 미국에서 화가로 활동하시다 조부께서 급성 신우염으로 유명을 달리하시면서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꿈을 접고 간송미술관과 보성중 고등학교를 운영하는 데 인생을 바치셨다. 더 큰 목적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꿈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아버지의 족적을 따라 지금까지 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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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째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옛 이름)을 지키고 있는 전인건 관장은 "간송미술관의 문화재는 나 개인의 유산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라며 "내 것도, 우리의 것도 아닌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진 =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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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있다

▲착공 2년여 만에 준공됐고, 준비기간까지 포함하면 10년 정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오는 9월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개관전에는 신윤복의 미인도, 훈민정음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간송문화재단이 소장한 대표적인 국보와 보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서울, 경기권 외 지방에서도 더 편하게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목표의 첫 결실이다.

-이번 보수 공사 과정에서도 새로운 작품을 발견할 만큼 수장고 내 소장품 규모가 어마어마한데, 이런 유산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부담이 상당할 것 같다.

▲왜 압박감이 없겠나. 하지만 간송미술관의 문화재는 나 개인의 유산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다. 내 것도, 우리의 것도 아닌 다음 세대에게 온전히 전해야 할 것들이다. 데카르트의 명언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내 좌우명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나는 이 말을 되뇌곤 한다.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인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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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재개관전에 공개된 '일기대장'. 간송 전형필이 1936~1938년 입출금 내역을 기록한 책으로 매년 1월부터 12월까지 입출금 내역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보물로 지정된 심사정의 '촉잔도권' 등의 구입 기록이 남아있다.[사진제공 = 간송미술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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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목표와 계획이 궁금하다.

▲2013년 재단화(財團化)라는 변화를 거치면서 그전부터 실무를 해왔지만, 아버님이 관장을 하실 때 과장으로 일했듯 지금도 과장형 관장으로 같은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 우리의 고미술, 옛 문화재들을 더 많은 분께 더 편하게 보여드리고 더 알고 싶게 하는 것.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간송미술관의 목표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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