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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5월, 모모의 날을 상상하기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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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8일 김규진의 모모일기에 실린 라니의 뒷모습 . 아가의 통통한 볼이 눈길을 끈다. 김규진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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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연 | 인구·복지팀장



나는 랜선 이모. 아무런 품은 들지 않고, 온라인에 올라오는 랜선 조카들의 귀여운 모습을 지켜본다. 조카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강아지·고양이·참새 조카 등등. 이런 비인간동물 위주의 랜선 조카 목록에 첫 인간동물이 등장했다. 바로 라니다. 라니는 동성 부부인 김규진·김세연씨가 벨기에에서 정자 기증을 받아 지난해 8월 낳은 딸이다. 한겨레 누리집에 연재 중인 ‘김규진의 모모(엄마와 엄마)일기’와 김규진씨의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라니의 소식을 확인한다. 초상권을 지키려는 모모의 노력에 라니의 얼굴을 온전히 보기 어렵지만, 뒤통수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자랐는지, 동그란 볼은 얼마나 더 통통해졌는지, 고양이 옆에 놓였던 발가락은 얼마나 작고 귀여운지를 살피는 기쁨이 크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바로 8일 어버이날, 15일 가정의 날, 21일 부부의 날 등이 몰려 있다. 지난주 라니의 뒤통수가 나온 사진을 보다 떠올렸다. 라니에게, 그리고 라니의 모모에게 가정의 달이란? 건강가정기본법에서 가족은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 단위로,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이루는 생활 단위로 본다. 김규진·김세연씨는 미국에서 혼인 신고를 했지만, 한국에선 아직 정식 혼인 신고를 할 수 없는 동성 부부다. 한국 법체계 안에서 정식의 가족을 이뤘다 보기 어렵다. 여성가족부는 2021년부터 건강가정기본법의 ‘가족’ 의미를 넓혀 비혼·동거 관계까지 포함하도록 법 개정을 추진했으나, 윤석열 정부 들어 논의는 거의 멈춤 상태다.



법체계 안에서 가족을 꾸리는 이들이 줄어들 테니 별 의미를 둘 필요 없을까? 각종 혼인 장려 및 지원, 저출생 대책이 즐비하지만, 가족 이루기를 포기하는 세태는 특수 상황이 아니라 보편적인 선택이 되어가고 있는 터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2024년 결혼·출산·양육 인식조사(25~49살, 2011명 대상)’ 결과를 보면, 여성 응답자 가운데 결혼을 ‘나중에라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한 비율은 33.7%에 달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합계출산율은 0.72명, 그마저 4분기에는 0.65명까지 떨어졌다(인구 유지를 위한 합계출산율은 2.1명이다). ‘국가 소멸’도 이제 그리 과한 표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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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31일, 정의당 의원들이 국회 본청 앞에서 ‘가족구성권 3법’(혼인평등법·비혼출산지원법·생활동반자법) 발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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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정부는 연간 합계출산율 0.7명마저 깨질 위기에 부산하다. 지난달 29일에는 기획재정부 자문위원회인 중장기전략위원회가 ‘인구위기 극복을 위한 중장기 정책과제’를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관련된 자료집에선 ‘다른 차원의 접근’을 강조했다. 출산율 제고와 더불어 당장 쓸 수 있는 여성·외국인 등을 경제활동 인구로 활용하고, 디지털 대전환으로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등의 다차원적 정책을 쓰자는 게 요지다.



그러나 정말 다차원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는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가족 의미의 다차원적 접근 말이다. 지난해 5월31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혼인평등법, 비혼출산지원법, 생활동반자법 등 가족구성권 3법을 발의했다. 낡은 가족 의미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신이 함께하기를 바라는 사람과 가족을 꾸릴 수 있도록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발의로부터 1년이 흘렀고, 3법은 모두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21대 국회 회기 종료까지는 단 3주 남았다.



가족구성권 3법이 곧 인구위기 해결책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꾸릴 권리를 보장받는다면 어떤 변화가 가능할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세상에 더 많은 라니가, 더 많은 모모가 존재할 수 있다. 비혼 여성이 혼자 아이를 낳아, 홀로 또는 혼인 관계가 아닌 동반자와 아이를 기를 수 있다. 다양성이 보장된 민주적이고 건강한 사회로 전환했을 때라야 오는 변화들이다. 국회든, 정부든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변화를 서둘러 끌어내야 한다. 5월, 나라가 정한 가족 바깥의 가족들은 정부의 빈곤한 상상력에 다채로운 색을 입힐 준비가 이미 되어 있다.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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