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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광화문에서/황규인]베테랑 스타 선수만 로봇심판에 화를 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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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한국프로야구를 주관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흔히 ‘로봇 심판’이라고 부르는 볼·스트라이크 자동 판정 시스템(ABS)을 올 시즌부터 도입했다. ABS는 카메라로 0.01cm 단위까지 투구 궤적을 추적해 이 공이 미리 입력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는지 아닌지 심판에게 알려준다. KBO는 ABS를 도입하면서 “모든 투수와 타자가 동일한 스트라이크 존을 적용받을 수 있어 공정한 경기 진행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선수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한화 투수 류현진(37)은 “(ABS가 기준으로 삼는) 스트라이크 존이 어제, 오늘이 다르고 구장마다 다르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KT 타자 황재균(37)도 거들었다. 그는 지난달 26일 SSG전 도중 포수가 뒤로 빠뜨린 공을 ABS가 스트라이크로 판단하자 헬멧을 내동댕이쳐 퇴장 명령을 받았다. 황재균은 “ABS는 타자가 쳐봐야 좋은 타구가 안 나오는 공까지 스트라이크로 판단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류현진과 황재균은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뛴 적이 있는 ‘스타 선수’다. 그럼 MLB에서 16년간 뛰었던 SSG 추신수(42)는 ABS를 어떻게 평가할까. 그는 “지금까지 내가 정립한 것들이 무의미해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류현진과 황재균이 불만을 품는 것도 ‘자신이 정립한 것들’이 무의미해져 생긴 일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투구 추적 시스템 발전과 함께 미국에서는 인간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 경향에 대한 연구가 여럿 진행됐다. 예컨대 투수는 올스타전 출전 횟수가 많을수록, 그러니까 스타 선수일수록 ‘애매한 공’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확률이 올라간다. 타자는 물론 반대다. 이에 대해서는 “심판이 무의식적으로 팬들의 기대 심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스타 선수가 잘하기를 바라는 팬들의 심리가 인간 심판의 마음마저 흔든다는 것이다.

ABS가 볼 판정을 내려 류현진을 쓴웃음 짓게 만들었던 공은 스트라이크 존 하단을 0.78cm밖에 벗어나지 않았다. 인간 심판이라면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린다고 해도 이상한 공이 아니었다. 거꾸로 황재균 같은 스타 타자가 타석에 섰을 때 인간 심판은 애매한 공에는 볼 판정을 내렸을 확률이 높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게 누렸던 어드밴티지가 사라지니 ‘ABS가 이상하다’란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유명한 영화 대사처럼 호의가 계속되니 권리인 줄 알았던 거다. 투수가 ‘볼이 돼야 했을 공을 ABS가 스트라이크로 판정했다’고 항의하거나, 타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판정을 문제 삼는 일은 없다.

야구장 바깥세상은 얼마나 다를까. 예를 들어 “이력서만 넣어도 들어갈 수 있는 중소기업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요즘 애들이 눈이 너무 높아 취직을 못 한다”는 말은 얼마나 사실에 가까울까. 이 역시 어르신들이 자신들이 누려온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나온 발언 아닐까. 한 취업 관련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한 군(郡) 소재 중소기업 경리직 사원을 1명 뽑는다는 구인 광고에 100명 넘게 지원서를 낸 상태였다.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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