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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대책 없이 살다 쫓기듯 죽을 건가요? 준비해야 '아름답게' 떠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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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 최초 호스피스 병원 세운 능행 스님
30년 현장 담은 책 '우리 봄날에...' 출간
죽음 배웅은 봉사 아닌 '돌봄 수행' 일념
"죽음은 삶만큼 소중...공부해야 질도 높아져"
한국일보

30년간 말기 암 환자들의 죽음을 배웅한 능행 스님은 삶과 죽음은 매 순간 함께 달려가는 것이라고 했다. 김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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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죽는 게 아니라 '언제라도' 죽습니다. 흐드러지게 피었다가도 한순간 '툭' 끊어지는 능소화처럼요. 순간 순간 삶 속에 죽음이 있는데 함부로 살 수 있겠습니까."


불교계 최초의 호스피스 전문 병원인 울산 정토마을 자재병원을 설립해 30년간 말기 암 환자들을 돌본 비구니 능행 스님이 에세이집 '우리 봄날에 다시 만나면'(김영사)을 펴냈다. 20년 전 쓴 책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이별이지는 않게', '숨', '이순간'의 내용 일부를 추려 새로 엮은 책이다. 7일 한국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그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준비 없이 황망하게 죽음을 맞고 있다"며 "생사가 다른 것이 아니며 죽음의 질이 결국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죽으면 누구든 길어 봐야 50시간 안에 한 줌 재가 되는 법..."


지금은 '불교계 최초의 호스피스 활동가'라는 수식어가 익숙하지만 시작은 우연이었다. 도반 스님들과 봉사하러 간 병원에서 평생 불교도로 산 말기 암 환자들이 다른 종교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한 후 개종하고 쫓기듯 생을 등지는 것을 본 것. 그 모습이 잊히지 않아 탁발과 모금을 통해 1996년 충북 청원에 작은 호스피스 센터를 만들어 오갈 데 없는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십시일반 후원을 통해 2013년 울산 울주군에 1만여 평 터를 마련해 호스피스 완화 의료전문기관인 정토마을 자재병원을 세웠다.

이후 출가 전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호스피스 병동 생활이 30년째 이어지는 중이다. 능행 스님의 일과는 숨 가쁘다. 100개가 넘는 병상을 돌보다 늦은 밤 잠자리에 들어 새벽같이 일어나 예불을 드리고 다시 환자들을 보살핀다. 하루에도 적게는 1, 2건, 많게는 5건 이상 임종을 목격한다. 끝없는 생사의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이 또한 수행'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사람이 죽으면 길어봤자 50시간 안에 한 줌의 재로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누구든 예외가 없지요. 죽음 하나하나가 '인생이 그런 것인 줄 알고 수행 정진하라'는 가르침이었어요. 수행자의 일로 받아들이니 힘들다고 토로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책에서 스님은 떠나보낸 환자들에 대해 "죽음의 종착역에서 만났던 그들 모두가 제법실상(諸法實相·우주만물의 참모습)의 진리를 설하고 증명해보였던 부처요, 스승이었다"고 묘사했다.

"병상이 법당이고 돌봄은 수행이다"

한국일보

능행 스님은 호스피스 활동을 병원이라는 법당에서 펼치는 '돌봄 수행'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중생이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일을 수행자로서 숙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김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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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깊은 절망에 빠진 말기 암 환자가 성직자와 전문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심신의 고통을 이겨내고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가장 좋은 병실인 임종실에서 가족들이 모여 환자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고, 임종하면 가족들도 10시간 이상 병실에 머물면서 충분한 작별의 시간을 보내며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일반 장례식에서는 볼 수 없는 애도의 풍경이 담겼다.

능행 스님은 "살면서 부정했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환자도, 가족도 남은 생이 얼마든 지금 이 순간을 잘 누릴 수 있게 된다"며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준비하는 것은 결국 삶의 전략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죽음의 순간을 담은 책이 실은 삶에 대한 지침서로 읽히는 까닭이다.

"죽음만큼 평등하고 정직한 것도 없습니다. 대책 없이 살다가 쫓기듯 죽을 것인지, 좋은 죽음을 설계함으로써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책임질 것인지는 온전히 나 자신에게 달려있어요."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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