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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서로의 말이 아닌 서로의 눈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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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로 참여한 한·중·일 연극, 격론 끝에 고전 ‘맥베스’ 선택

꼬리 무는 오해 풀려고 가진 술자리… 언어보다 눈으로 대화 시작

타인의 눈빛·감정 알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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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의 배우들을 모아서 연극을 올리는 프로젝트에 연출로 참여했었다. 정해진 계획은 없었다. 참가자들이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자율로 결정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첫날부터 혼란의 연속이었다.

나라별로 통역이 있었기에 누군가 한마디 하면 3국 언어가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무엇을 연극으로 올릴 것인가에 대해 뜨겁게 토론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모두가 합심하여 한 이야기를 만들어보는 시도를 했다. 쉽지 않았다. 서로 문화와 정서가 달랐고, 연극을 만들어가는 방식도 달랐다. 우리에게 재밌는 이야기가 저들에게는 재미가 없거나, 저들에게 감동적인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통역을 거치다 보니 서로 말은 통했지만 뉘앙스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뉘앙스를 전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또 다른 오해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장시간 혼선 끝에 모두가 아는 고전을 택하여 연극을 만들기로 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선정되었다. 내용은 모두가 알고 있기에 각자의 언어로 자유롭게 장면 연습을 해 나갔다. 역시나 혼란이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발음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억양도 다르고, 리듬도 다르고, 에너지도 달랐다. 서로의 대사는 알았지만 서로 느낌을 알기가 힘들었다. 내가 연출로서 생각하는 대사의 느낌이 있었지만, 그 느낌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말의 느낌과 분위기를 강조했지만 그것은 한국어 대사의 느낌과 분위기일 뿐이었다.

한동안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며칠 동안 연습실에 어색한 공기가 지속되었다. 답답함을 털고 싶어서 술자리를 가졌다. 주말이었기에 통역이 올 수 없었다. 스마트폰 통역 앱으로 더듬더듬 말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술이 점점 취하면서 흥이 올랐다. 앱을 통하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건배를 거듭했다. 말하는 시간보다 잔을 채우는 시간이 늘어났다. 통역 앱을 바라보는 시간보다 상대방 눈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서로 믿음이 쌓인 상태에서 바라보는 서로의 눈빛이 참 좋았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저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저들을 좋아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표현하고 싶어서 계속 그들 눈을 열심히 바라봐 주었다. 서로의 눈을 보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보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내일 연습부터는 배우들의 말보다 배우들의 눈에 더 집중해야겠다고.

다음 날의 연습도 여전히 말은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우들 눈빛은 대사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눈빛의 변화를 따라가니 마음의 변화가 느껴졌다. 마음을 느낄 수 있게 되니 그 배우의 연기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슬픔을 표현하는 대사에서 어떤 배우의 눈빛은 처음부터 슬픔에 젖어있었다. 어떤 배우는 슬픈 눈빛을 억지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때마다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해 주었다.

그 눈빛을 내기 위해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자신의 감정을 혼자 만들어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오히려 상대의 눈을 보며 말해 보자고, 상대의 눈을 보며 들어보자고. 서로 눈을 잘 바라봐주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아마도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 속에서 진실한 마음이 생겨날 수 있을 거라고.

그날 연습 이후, 배우들은 자신의 눈빛이 아닌 상대방의 눈빛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더 느끼기보다 상대방의 감정을 더 바라보게 되었다. 타인의 눈빛과 감정을 느끼기 위해 애쓰는 사람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연습 기간 내내 생각했다. 이것은 어쩌면 연극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도 정말 중요한 깨달음이 될 것 같다고.

조선일보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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