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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국민연금 공론화, 승패 가르는 게임 아니다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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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2일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이 국민연금 보장성강화 및 기금거버넌스 정상화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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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홍식 |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소셜코리아 운영위원장



세상 살다 보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고, 져도 진 것이 아닌 일들이 있다. 이번 국민연금 개혁을 위한 공론화의 결과가 그렇다. 성, 연령, 지역을 대표하는 492명의 시민대표단이 한달여에 걸친 학습과 토론을 거쳐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높이고, 보험료는 9%에서 13%로 높이는 개혁안을 다수안으로 채택했다.



사전 조사에서는 재정안정론을 지지하는 비율이 44.8%로 소득보장론을 지지하는 비율 36.9%보다 높았다. 하지만 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소득보장론을 지지하는 비율이 절반을 넘는 56.0%로 높아졌고, 재정안정론을 지지하는 비율은 42.6%로 낮아졌다.



누가 이긴 것일까?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공론화 과정에 참가했던 시민대표단이 이번 연금 개혁을 소득보장과 재정안정 중 하나를 선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초에 두 주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조화시킬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무려 40%에 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멕시코와 튀르키예를 한국의 경쟁 상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노인 빈곤 문제를 놓고 보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멕시코의 노인 빈곤율은 20%로 우리나라의 절반에 불과하고 튀르키예는 14%이다.



법정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한다면, 1975년생과 2005년생이 연금을 수급하는 2040년과 2070년에는 실질 소득대체율이 24%로, 지금보다 더 낮아진다. 이렇게 되면 청년 세대와 미래 세대가 노인이 되었을 때도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오이시디 회원국 중 가장 높은 27~30%가 된다.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이 낮아도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이 있으니 괜찮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평범한 국민이 퇴직연금이나 개인연금을 노인이 될 때까지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퇴직연금을 수급하는 노인은 전체 노인의 0.1%인 9천명에 불과하다. 목돈이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이 퇴직금이기 때문이다.



개인연금은 어떤가? 2007년 국민연금의 법정 소득대체율을 60%에서 40%로 낮추는 개혁을 여야 합의로 시행하면서, 정부는 낮아진 국민연금의 소득보장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개인연금을 활성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실제로 개인연금은 10년 이내에 해지하는 비율이 44%나 된다. 더욱이 소득 계층에 따른 차이도 커 고소득층은 거의 70%가 가입해 있지만, 저소득층은 4%만 가입해 있다. 현재 개인연금을 수급하는 비율도 전체 노인 중 4%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에서 공론화에 참여했던 시민대표단이 소득대체율을 높이자는 주장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8~29살 청년 대표 중 53.2%가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안을 지지했던 이유였을 것이다. 시민대표단은 누군가 최소 12년 이상 공부하고 30년 가까이 열심히 일하며 기여금을 냈다면, 취약계층은 빈곤에서 벗어나고, 중산층은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국민연금을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다고 소득보장론을 지지하는 시민대표단이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염려하지 않았겠나? 그렇지 않다. 숙의 과정에서 시민대표단은 소득보장을 강화할 때 어떻게 재원을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지를 전문가들에게 집요하게 물었다. 그 질문들이 너무 날카로워 전문가들이 진땀을 흘려야 했다.



이번 시민대표단의 공론화 결과를 두고, 세상을 승자와 패자로만 구분하는 사람들은 나라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한마디 드리고 싶다. 국민이 직면한 삶의 현실을 보시길. 더불어 숙의민주주의를 거쳐 도출한 결론조차 부정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길이 있는지도 묻고 싶다.



우리가 할 일은 공론화 결과를 부정하고 폄훼하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논쟁을 했다면, 시민의 선택을 받아들이자. 소득대체율을 그대로 유지하고 보험료만 올리는 개혁안은 청년 세대와 미래 세대가 노인이 되었을 때, 예견된 빈곤을 방치한다는 점에서 재정 불안정이라는 “병”보다 “더 위험한 치료법”이다. 예견된 빈곤을 방치하는 것은 “심리적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제 정치권과 전문가가 할 일은 머리를 맞대고 다수의 시민대표단이 선택한 “적정한 보험료를 부담하며,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그 길이 실현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소득보장론을 지지했다고, 재정안정화론을 지지했다고 서로가 적이 될 이유는 없다. 둘 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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